1화
약 14분 · 총 6,822자

책장 너머의 살의

주인공: 묵연(墨淵)

새벽 서리가 낙화진을 덮었다.

묵연은 먼지 쌓인 책장을 닦다가 손을 멈췄다.

손바닥에 붉은 게 묻어 있었다.

'또.'

헝겊을 쥔 손이 떨렸다.

세 번째 악몽이었다. 어젯밤에도 똑같이 깨어났다. 침상은 땀에 젖어 있었고, 입안엔 녹슨 철 맛이 맴돌았다.

묵연은 손을 물동이에 담갔다.

물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착각이었다. 다시 보니 맑았다.

그는 물기를 털고 다시 책을 정리했다. 책장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먼지가 빛 속을 떠다녔다.

'혈마심경' 상권이 손에 잡혔다.

묵연은 책등을 쓰다듬다가 다시 꽂아넣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아니, 박살났다.

경첩이 찢어지며 문짝이 벽에 부딪혔다. 먼지가 폭발하듯 흩날렸고, 책 몇 권이 선반에서 떨어졌다.

남자가 들어섰다.

키 팔척의 거한이었다. 어깨엔 붉은 검집이 매달려 있었고, 검병에는 핏자국 같은 붉은 끈이 감겨 있었다.

"네놈이 그 유명한 서점 주인이냐."

목소리가 서점을 눌렀다.

묵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떨어진 책을 주워 선반에 올렸다.

"혈랑검 진무혁."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이름을 아는군."

"소문은 들었어."

묵연이 먼지를 털었다.

"책만 판다."

"웃기는 소리 마라."

진무혁이 한 발 들어섰다. 발소리가 나무 바닥을 울렸다.

"내 제자가 죽어가고 있다. 주화입마에 빠진 지 사흘째다. 놈을 살릴 비급이 여기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묵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발소리만 울렸다. 책등들이 그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진무혁의 손이 검병을 움켜쥐었다.

"대답 없나."

살기가 번졌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책장 위 먼지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묵연의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 실내에서 흔들렸다.

묵연이 멈췄다.

돌아봤다.

눈빛이 달랐다.

차가웠다. 겨울 호수 밑바닥처럼 깊고 어두웠다. 감정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진무혁의 숨이 목에 걸렸다.

'이 눈빛은...'

살기가 얼어붙었다.

공기가 정지했다. 먼지가 허공에 멈춰 섰다. 진무혁의 손에서 땀이 흘렀다.

"책만 판다고 했어."

묵연의 목소리는 낮았다.

진무혁이 한 발 물러섰다. 본능이었다. 검을 잡은 삼십 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압박이었다.

'이 자가... 대체...'

묵연이 눈을 감았다.

숨을 한 번 쉬었다.

눈을 뜨자 다시 평범한 서점 주인이었다.

"혈마심경 하권을 찾는 거야?"

진무혁이 침을 삼켰다.

"...그렇다."

"없어."

"뭐?"

"그 책은 세상에 없어. 애초에 하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어."

진무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

"거짓말 안 해."

묵연이 책장 앞에 섰다. 손가락이 책등들을 훑었다. 멈췄다.

낡은 동화책 한 권을 꺼냈다.

표지엔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걸 읽어봐."

"...뭐?"

진무혁이 책을 받아들었다. 손이 떨렸다.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토끼전이라고?"

"그래."

"내 제자가 죽어가는데 동화책을 읽으라고?"

묵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등을 돌린 채였다. 무방비였다. 하지만 진무혁은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왜... 손이 안 움직이지...'

그때 문이 열렸다.

이번엔 조용했다.

여인이 들어섰다.

백의였다. 치마가 바닥을 스치며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허리엔 옥빛 검집이 매달려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목소리가 맑았다.

진무혁이 돌아봤다.

"청운검파..."

"소연화입니다."

여인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이곳에서 잃어버린 검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진무혁과 소연화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공기가 갈라졌다.

두 사람의 내공이 서로를 견제했다. 책장 위 먼지가 소용돌이를 그렸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렸다.

묵연이 한숨을 쉬었다.

"싸우려면 밖에서 해."

한마디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두 사람의 기운이 사라졌다.

한순간이었다. 소연화의 검집에서 흘러나오던 검기가 증발했다. 진무혁의 어깨에서 피어오르던 살기가 꺼졌다.

둘 다 얼어붙었다.

'말 한마디로 내공을 끊어버렸다고?'

소연화의 손이 떨렸다.

'불가능해... 어떻게...'

진무혁이 뒷걸음질쳤다.

묵연은 그들을 보지도 않았다.

책장 맨 위,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내렸다. 표지가 닳아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청운검파의 현월십삼초."

소연화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걸..."

"삼 초가 아니라 십삼 식이야.

# 책장 너머의 살의 (전개부)

"삼 초가 아니라 십삼 식이야."

묵연이 책을 펼쳤다.

누런 종이 사이로 먼지가 날렸다. 검법의 그림이 아니었다. 병법서였다.

소연화가 다가섰다.

"병법서요?"

"그래."

묵연이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적을 쫓을 땐 십리를 더 간다. 검도 마찬가지야."

소연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가락이 책장을 더듬었다. 글자가 아니라 그 사이의 여백을 읽고 있었다.

'이건... 검법이 아니라 검의 본질을...'

진무혁이 비웃었다.

"웃기는 소리. 병법으로 검을 깨우친다고?"

"읽어보면 알아."

묵연이 책을 덮어 건넸다.

소연화가 받아들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책이 아니라 검을 쥔 것처럼 무거웠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무혁이 코웃음 쳤다.

"나도 감사해야 하나? 토끼 이야기 따위로?"

묵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봤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햇빛이 탁했다. 먼지가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무언가에 물든 것 같았다.

'벌써.'

손끝이 저렸다.

진무혁이 토끼전을 집어던졌다.

책이 바닥을 굴렀다.

"장난하나!"

검을 뽑았다.

검신이 붉었다. 핏빛이 아니었다. 쇠 자체가 붉게 단련된 것이었다. 검기가 공기를 갈랐다. 책장의 책들이 떨렸다.

"내 제자가 죽어가는데 동화책을 읽으라고? 네놈이 날 우습게 보는 거냐!"

소연화가 물러섰다.

검을 뽑지 않았다. 뽑을 수 없었다. 진무혁의 검기가 서점 전체를 눌렀다. 혈랑검의 살기가 벽을 기어올랐다.

묵연이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토끼전을 주웠다.

먼지를 털었다.

천천히 일어섰다.

"읽지 않을 거야?"

목소리가 달랐다.

낮았다. 아주 낮았다. 소리가 아니라 진동이었다. 바닥이 울렸다. 책장이 떨렸다. 창문이 흔들렸다.

진무혁의 검이 멈췄다.

아니, 멈춰졌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검기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얼어붙었다. 공기 자체가 응고된 것처럼 검이 허공에 박혀 있었다.

"이, 이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묵연이 한 걸음 다가섰다.

진무혁이 뒷걸음질쳤다.

검을 든 채로 물러섰다. 무협 고수가 아니었다. 겁먹은 짐승이었다.

"주화입마는 마음의 병이야."

묵연이 책을 내밀었다.

"네 제자는 강해지려고 혈마심경을 탐했어. 하지만 혈마심경 하권은 없어. 애초에 없었어."

"그럼..."

"상권만으로 충분해. 문제는 욕심이야."

묵연이 토끼전을 펼쳤다.

"토끼는 용궁에 가서 거짓말을 했어. 간을 두고 왔다고. 그게 살 길이었어."

진무혁의 얼굴이 하얘졌다.

"네 제자도 마찬가지야. 더 얻으려다 죽어. 가진 걸 버리는 법을 배워야 살아."

책이 진무혁의 손에 놓였다.

진무혁이 떨리는 손으로 책을 펼쳤다.

토끼 그림이 보였다. 그 순간 뭔가가 스쳤다. 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날 밤.

'더... 더 강해져야 합니다, 사부님...'

손이 떨렸다.

"...읽어볼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묵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돌렸다.

다시 책장으로 향했다. 발소리만 울렸다. 책등들이 석양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소연화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죠?"

묵연이 멈췄다.

대답하지 않았다.

"비급을 팔지 않으면서 비급보다 귀한 걸 건네주는 사람. 말 한마디로 고수의 내공을 끊어버리는 사람."

소연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우리 문파의 소실된 검법까지 알고 있는 사람."

묵연의 어깨가 굳었다.

진무혁이 검을 거뒀다.

"나도 궁금하군. 대체 정체가 뭐냐."

침묵이 흘렀다.

묵연이 천천히 돌아섰다.

눈빛이 비어 있었다.

"그냥 책 파는 사람이야."

"거짓말."

소연화가 검병을 잡았다.

"당신 눈빛을 봤어요. 그건 책만 읽은 사람의 눈이 아니에요."

묵연이 눈을 감았다.

숨을 쉬었다.

'들켰나.'

심장이 뛰었다. 아니, 뛰는 게 아니라 조였다. 늑골 사이로 뭔가가 기어올라왔다. 오래전 느낌이었다. 검을 들고 문파를 불태우던 그날 밤의 감각.

'아직은 안 돼.'

눈을 떴다.

"나가줘."

"뭐?"

"해 지기 전에 나가줘."

목소리가 떨렸다.

소연화와 진무혁이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이상했다. 묵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까 그 압도적인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은 그냥 겁먹은 사람 같았다.

"왜죠?"

"...위험해."

"무슨?"

묵연이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봤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 너머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주 가늘게. 일반인은 볼 수 없는 거리였다.

하지만 묵연은 알았다.

# 책장 너머의 살의 (위기-결말부)

'천마교.'

묵연의 손톱이 책등에 박혔다.

나무가 갈라졌다. 아주 작게. 하지만 소연화의 귀가 그걸 들었다.

"방금..."

"나가."

묵연이 돌아섰다.

얼굴이 창백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진무혁이 토끼전을 덮었다.

"대체 뭐가 오는 거냐?"

대답 대신 바람이 불었다.

창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바람이 불었다. 책장의 책들이 일제히 떨렸다. 먼지가 소용돌이쳤다.

소연화가 검을 뽑았다.

"이 기운은..."

마기(기)였다.

공기가 썩는 냄새가 났다. 아니, 냄새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진무혁의 얼굴이 굳었다.

"천마교?"

묵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까지?"

"항상 쫓아와."

목소리가 갈라졌다.

묵연이 책장 뒤로 걸어갔다. 손이 벽을 더듬었다. 나무판자가 삐걱거렸다. 숨겨진 공간이 열렸다.

검은 천이 보였다.

천 위로 뭔가가 비쳤다. 검집이었다. 아니, 검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컸다. 거의 장검에 가까운 크기였다.

소연화가 숨을 죽였다.

'저 검에서 나오는 기운은...'

천마검.

전설로만 전해지는 마도의 신검. 천마교주만이 다룰 수 있다는 검.

"설마..."

진무혁이 뒷걸음질쳤다.

"네놈이... 천마?"

묵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냥 바라만 봤다. 손이 떨렸다. 검집이 희미하게 울렸다.

'아직은...'

눈을 감았다.

십 년 전이 떠올랐다. 불타는 문파들. 피로 물든 강호. 자신의 손에 쓰러진 수백 명의 무인들.

'다시는 잡지 않겠다고...'

그때 문이 열렸다.

바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열었다.

검은 도포를 입은 자가 들어섰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두건이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손이 보였다.

핏빛 손톱.

소연화가 검을 겨눴다.

"천마교도!"

진무혁이 혈랑검을 들었다.

"감히 이곳까지!"

검은 도포가 웃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쇠 긁는 소리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천마님."

묵연의 어깨가 떨렸다.

"...돌아가."

"불가능합니다."

검은 도포가 한 걸음 다가섰다.

바닥이 썩었다. 발이 닿은 자리마다 나무가 검게 변했다. 마기가 스며든 것이었다.

"교주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십 년째 비어 있습니다."

"내가 버린 자리야."

"버릴 수 없습니다."

검은 도포의 손이 허리로 갔다.

검은 단도를 꺼냈다. 날이 굽어 있었다. 독이 묻어 있었다. 공기가 지글거렸다.

"돌아오시든지, 죽으시든지."

소연화가 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날아갔다. 푸른빛이었다. 청운검파의 기본초식, 청풍일섬(풍).

검은 도포가 손을 들었다.

마기가 솟았다.

검기가 마기에 닿자 증발했다.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청운검파?"

검은 도포가 고개를 기울였다.

"약하군요."

손가락을 튕겼다.

마기가 화살처럼 날아왔다.

소연화가 검을 세웠다.

마기가 검신을 때렸다. 불꽃이 튀었다. 소연화의 몸이 뒤로 밀렸다. 발이 바닥을 긁었다.

'이 힘은...'

입에서 피가 흘렀다.

진무혁이 뛰어들었다.

혈랑검이 붉게 빛났다. 살기가 검신을 타고 흘렀다. 혈랑검법 오초식, 혈살광풍(혈풍).

검은 도포가 단도를 휘둘렀다.

한 번만.

혈랑검이 튕겨 나갔다.

진무혁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피가 흘렀다.

"이것도 약하군요."

검은 도포가 웃었다.

"역시 천마님이 아니면 재미가 없습니다."

묵연이 눈을 떴다.

차가웠다.

감정이 사라졌다. 책 읽던 서점 주인이 아니었다. 십 년 전 강호를 피로 물들인 천마였다.

"경고했어."

목소리가 낮았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책장이 흔들렸다. 바닥이 갈라졌다.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검은 도포의 웃음이 멈췄다.

"...역시."

묵연이 한 걸음 내디뎠다.

검은 천을 잡지 않았다. 천마검을 뽑지 않았다. 맨손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공기가 칼날이 되었다. 묵연의 주변이 일그러졌다. 책들이 저절로 찢어졌다. 종이가 공중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천마신공(천).

검 없이도 천지를 베는 마도의 극의.

소연화가 벽에 등을 붙였다.

'이게 천마의 힘...'

진무혁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괴물이야...'

검은 도포가 단도를 거뒀다.

무릎을 꿇었다.

"역시... 천마님이십니다."

묵연이 멈췄다.

손이 떨렸다. 눈빛이 흔들렸다. 천천히 감정이 돌아왔다.

"...가."

"하지만."

검은 도포가 고개를 들었다.

두건 아래로 눈이 보였다. 핏빛이었다. 사람 눈이 아니었다.

총 6,822자 · 약 14분

- 1 화 끝 -

AI 생성 콘텐츠 · 작가 케뤼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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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착각물#은퇴#심리전
케뤼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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