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품은 초대장
주인공: 서이안
문자가 도착한 건 민혁이 떠난 지 세 시간 후였다.
'언니, 내일 시간 돼? 오랜만에 보고 싶어. 홍대 그 카페, 기억하지?'
이안은 화면을 내려다보며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입술 사이로 스며든 비린 맛이 혀끝을 감쌌다.
홍대 그 카페.
전생에서 서하가 처음 '조언'을 건넨 곳이었다.
'언니 요즘 좀 이상해. 민혁 오빠한테 집착하는 것 같아 보여서…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나는 언니 편이니까 미리 얘기해주는 거야.'
그날 이안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서하의 눈빛이 너무 맑았으니까.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면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번엔 다르다.'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식어 내려갔다.
답장을 보낸 건 새벽 두 시였다.
'그래. 내일 세 시.'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손톱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희미하게 피가 배어 나왔다.
***
출근길 지하철은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안은 구석 손잡이를 붙잡고 창밖을 응시했다. 터널 벽이 빠르게 지나가는 동안, 민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했어요.'
과거형.
그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긁어댔다.
'왜 과거형이었을까.'
손톱을 물어뜯으려던 손을 억지로 내렸다. 옆자리 여자가 힐끗 쳐다봤다.
회사 건물 앞에 내렸을 때, 민혁이 서 있었다.
검은색 코트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아침 햇살이 그의 옆모습을 날카롭게 잘라냈다.
이안은 발걸음을 멈췄다.
"…왜 여기 계세요."
"카페 약속 취소하세요."
민혁이 고개를 돌렸다. 눈 아래 그림자가 짙었다.
"상관없어요."
이안이 그를 지나쳐 걸으려 했지만, 민혁이 앞을 가로막았다.
"서하는 위험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알아요."
"알면서 왜—"
"제가 직접 확인해야 하니까요."
이안은 민혁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전생에서도 그랬죠. 혼자 다 떠안으려고 했잖아요."
민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래서 결국…"
문장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안은 그를 지나쳐 회사 건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민혁의 시선이 꽂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
오후 두 시,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퇴근합니다."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 아파?"
"개인 일정이 있어서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 끝 비상계단 앞에서 민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안실에 아는 사람 있어요."
민혁이 차 열쇠를 꺼냈다.
"같이 가죠."
이안은 한참 그를 바라봤다. 민혁의 턱선이 굳어 있었다.
"조건이 있어요."
"뭐든지."
"10미터 떨어져 계세요. 제가 신호 보내기 전엔 절대 개입하지 마세요."
민형의 입술이 얇게 떨렸다.
"…약속할게요."
***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이안은 창밖을 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민혁이 힐끗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췄을 때, 민혁이 입을 열었다.
"서하는 처음엔 항상 선의로 접근해요."
"알아요."
"당신 주변 사람들한테 먼저 말을 퍼뜨리죠. '이안 언니 요즘 이상해', '민혁 오빠한테 집착하는 것 같아'. 그렇게 고립시켜요."
이안의 손톱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다음엔 직접 조언을 건네요. 친구인 척하면서. '언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민혁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당신은 그때 아무한테도 말 안 했죠. 혼자 견디려고만 했고."
"…그만해요."
"결혼식 전날, 서하가 당신 방에 찾아왔을 때도 혼자 있었어요. 아무도 몰랐죠."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민혁의 손이 핸들을 꽉 쥐었다.
"제가… 봤으니까요."
"어디서요."
"복도 끝에서."
"왜 거기 있었어요."
민혁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신호등이 바뀌었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민혁이 액셀을 밟았다.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당신을 지키려고 했어요."
"전생에서요?"
"…네."
"그런데 왜 계단에서 떨어질 때는 안 계셨어요."
민혁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건…"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죠."
이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민혁이 대답하지 못했다. 턱선이 바르르 떨렸다.
"…늦었어요."
"얼마나요."
"5분."
이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5분.
그 시간 동안 자신은 계단 아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서하의 하얀 구두가 시야 끝에서 사라지는 걸 보면서.
# Part 2: 전개
카페 입구 앞에서 차가 멈췄다.
이안은 안전벨트를 풀며 민혁을 봤다.
"10미터예요."
"…알아요."
민혁의 손이 핸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이안이 문을 열려는 순간, 민혁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 여자 옆에 앉지 마세요."
"상관없어요."
"이안 씨."
민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생에서 서하가 당신한테 준 음료… 그 안에 수면제가 들어 있었어요."
이안의 손목에서 힘이 빠졌다.
"어떻게 알아요."
"당신이 쓰러진 뒤에 컵을 회수했어요.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땐 이미…"
민혁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안은 천천히 손을 빼냈다.
"그럼 이번엔 안 마시면 되죠."
차 문이 닫혔다. 민혁의 얼굴이 유리창 너머로 일그러졌다.
***
카페 안은 따뜻했다.
서하가 창가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연한 핑크색 니트 차림에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모습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전생과 똑같네.'
이안은 무표정하게 다가가 마주 앉았다.
"언니, 오랜만이야!"
서하가 환하게 웃었다. 테이블 위엔 이미 두 잔의 음료가 놓여 있었다.
"언니 좋아하는 캐러멜 마키아토 시켜뒀어. 따뜻한 걸로."
이안은 컵을 보지 않았다.
"고마워요. 근데 전 아이스로 마실래요."
서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에이, 날씨 추운데 따뜻한 게 좋지 않아?"
"괜찮아요."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서하가 손을 뻗어 컵을 밀어냈다.
"그럼 이거 내가 마실게. 언니 거 새로 시켜줄게."
"아니에요. 제가 직접 주문할게요."
이안은 카운터로 향했다.
등 뒤에서 서하의 시선이 따라왔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카운터 직원이 주문을 받는 동안, 이안은 가방 속 녹음기를 살짝 눌렀다. 작은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서하의 표정은 다시 밝아져 있었다.
"언니, 요즘 어때? 회사 일 괜찮아?"
"그럭저럭요."
"민혁 오빠랑은 잘 지내?"
이안의 손가락이 컵을 감쌌다. 차가운 촉감이 손바닥에 번졌다.
"왜요."
"아니, 오빠가 요즘 좀 이상해서. 언니한테만 집착하는 것 같아서 걱정됐어."
서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집착이요."
"응. 지난주에도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며? 주변에서 다들 그러던데."
이안의 입술이 얇게 떨�렸다.
'또 시작이네.'
전생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빌려 독을 뿌리는 것.
"서하 씨도 오빠 좋아하시잖아요."
이안이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하의 미소가 1초간 굳었다.
"…뭐?"
"민혁 씨. 서하 씨 좋아하시죠."
"언니, 무슨 소리야. 오빠는 내 사촌 오빠인데."
"혈연은 아니잖아요."
이안이 서하의 눈을 똑바로 봤다.
서하의 손가락이 컵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톱 밑이 하얗게 변했다.
"언니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난—"
"오해 아니에요. 전생에서 봤으니까."
서하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졌다.
"…전생?"
"서하 씨도 기억하시죠."
이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결혼식 전날 밤, 제 방에 왔을 때."
서하가 뒤로 물러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언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언니, 오빠는 언니를 사랑한 적 없어. 그냥 동정심이었을 뿐이야.' 그렇게 말했잖아요."
서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미쳤어?"
"제가 미쳤을 수도 있죠.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으니까."
서하가 벌떡 일어났다. 가방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서하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하이힐 소리가 복도로 멀어졌다.
이안은 테이블 위 서하의 컵을 바라봤다. 반쯤 남은 캐러멜 마키아토 위로 거품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저 컵.'
전생에서 자신이 마셨던 것과 똑같았다.
이안은 가방에서 작은 키트를 꺼냈다. 약국에서 산 간이 검사지였다.
컵 가장자리에 검사지를 살짝 담갔다.
5초 후, 종이 끝이 푸르게 변했다.
'벤조디아제핀.'
수면제.
이안의 손이 떨렸다. 검사지가 테이블에 떨어졌다.
'처음부터 계획한 거였어.'
서하는 이안이 따뜻한 걸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미리 약을 탄 음료를 준비해뒀고, 이안이 거절하자 자기가 마시는 척하며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그럼 다음 수는 뭐지.'
이안이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는 순간,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였다.
전화 통화 중이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화장실 앞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녹음기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 Part 3: 위기-클리프행어
"…언니 표정 봤어? 완전 무너졌어."
서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안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죽였다. 녹음기의 빨간 불이 깜박였다.
"이번엔 오빠도 못 구해줄 거야. 5분이면 충분하거든."
5분.
민혁이 말했던 그 시간.
이안의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응, 약은 이미 탔어. 아까 컵 바꿀 때 넣었어. 언니가 카운터 가는 사이에."
'카운터에서 받은 컵.'
이안의 시선이 테이블 위 자기 컵으로 향했다. 얼음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민혁 오빠, 미안하지만 이번 생에서도 넌 내 거야. 언니는 또 계단에서 떨어질 거고."
서하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이번엔 CCTV도 없어. 카페 뒤편 비상계단은 사각지대거든."
이안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또.'
전생과 똑같았다. 서하는 항상 완벽하게 준비했다.
"30분 후에 전화할게. 그때쯤이면 언니 정신 몽롱해질 거야. 비상계단까지만 유도하면 돼."
통화가 끊어지는 소리.
이안은 재빨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살짝 열어둔 채 틈새로 복도를 봤다.
서하가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며 걸어왔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표정.'
전생에서 수없이 봤던 얼굴이었다.
서하가 화장실 앞을 지나쳤다. 이안은 10초를 센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민혁이었다.
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 있었다.
"…다 들었어요."
민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안은 그의 손에 든 휴대폰을 봤다. 화면에 녹음 앱이 켜져 있었다.
"10미터 떨어져 있으라고 했잖아요."
"복도 끝이 10미터예요."
민혁이 한 발 다가섰다.
"당신 컵에도 약 탔어요. 지금 당장 나가야 해요."
"알아요."
이안이 그를 지나쳐 가려 하자, 민혁이 팔을 붙잡았다.
"혼자 못 가요."
"놔요."
"전생에서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전…"
민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5분 늦었죠. 그 5분 동안 뭐 하셨어요."
이안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민혁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서하를 쫓아갔어요."
"왜요."
"증거를 잡으려고."
"그래서요."
이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증거 잡았어요?"
민혁이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이 증거 찾는 동안 전 계단 아래 누워 있었어요. 목뼈 부러진 채로."
"이안 씨…"
"이번엔 다를 거라고 했죠. 근데 또 10미터 떨어져 있으라고 하고, 또 약 탔다고 알려주고. 그게 다예요?"
이안이 한 발 물러섰다.
"전 혼자 할 수 있어요."
"안 돼요."
민혁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번엔 제가 지킬게요. 5분이 아니라 5초도 안 떨어질게요."
"필요 없어요."
이안이 그의 손을 떼어내려는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벌써?'
다리에 힘이 빠졌다.
민혁이 재빨리 그녀를 받쳐 안았다.
"약 효과 시작됐어요. 지금 나가요."
"…아직 괜찮아요."
이안이 벽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무릎이 꺾였다.
민혁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놔요!"
"안 놔요."
민혁이 출구 쪽으로 걸었다.
이안의 시야에서 복도가 천천히 기울었다. 형광등 불빛이 번져 보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손끝이 저렸다. 녹음기를 움켜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녹음기… 떨어뜨리면…"
"안 떨어뜨려요."
민혁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카페 홀이 가까워졌다. 서하가 앉아 있는 테이블이 보였다.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민혁의 품에 안긴 이안을 봤다.
"오빠?"
서하가 벌떡 일어났다.
"언니가 왜 저래?"
"비켜요."
민혁이 차갑게 말했다.
서하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일 있어? 언니 괜찮아?"
"괜찮지 않아요. 당신이 탄 약 때문에."
서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약? 오빠 무슨 소리야.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녹음 다 됐어요."
민혁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줬다.
서하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졌다.
"그건… 오빠가 오해한 거야. 내가 설명할게."
"경찰한테 하세요."
민혁이 그녀를 지나쳐 출구로 향했다.
서하가 민혁의 팔을 붙잡았다.
"오빠, 제발. 나 진짜 언니 생각해서 한 거야. 언니가 오빠한테 집착하는 거 이상했어. 그래서…"
"손 떼요."
민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서하의 손이 떨렸다. 눈가가 붉어졌다.
"오빠는 원래 내 거였잖아. 언니가 빼앗아간 거야.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민혁의 턱선이 굳었다.
"한 번도 당신 거였던 적 없어요."
서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안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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