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읽는 왕자
주인공: 이도
담장 너머로 몸을 던지는 순간, 이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진짜 이게 제일 짜릿하다니까."
궁궐 담을 넘는 건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였다. 내관들이 잠든 깊은 밤, 북악산 기슭을 따라 관상감으로 향하는 길은 이제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발밑에 깔린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형님은 또 뭐라 하시려나.'
양녕대군 형님은 이도가 궁을 빠져나갈 때마다 혀를 찼다. 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은근슬쩍 시선을 돌려주곤 했다.
관상감 뒤편 관측소가 보였다. 낡은 목조 건물이지만, 지붕 위로 솟은 관측 기구들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이도는 담을 타고 넘어 마당으로 내려섰다.
"좋아, 오늘은 북두칠성 각도를 제대로..."
말끝이 흐려졌다.
관측소 안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누가 있어?'
이 시간에 관상감을 찾는 사람은 이도밖에 없었다. 관상감 학자들은 해가 지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이도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혼천의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젊은 학자였다. 남루한 도포 차림이지만 자세는 반듯했다. 촛불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혼천의의 눈금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도가 헛기침을 했다.
"저기."
학자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빛이었다.
"누구십니까."
말투도 차가웠다. 이도는 멋쩍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나? 나는 그냥... 별 보러 온 사람?"
"그냥 별을 보러 온다는 건 없습니다."
학자가 일어섰다. 키는 이도보다 조금 작았지만, 시선은 날카로웠다.
"관상감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아, 진짜. 그렇게까지 따질 거야?"
이도는 혼천의 쪽으로 걸어갔다. 학자가 황급히 몸을 돌려 막아섰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지금 동지의 일출 시각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동지 일출? 그거 나도 계산하고 있었는데."
이도는 학자를 밀어내고 혼천의를 들여다봤다. 눈금이 복잡하게 새겨진 청동 고리들이 겹쳐져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눈금을 짚었다.
"이 각도면 되는 거 아니야? 황도 기준으로 23도 반쯤..."
"틀렸습니다."
학자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날아왔다.
"각도가 3도 틀렸습니다. 그렇게는 동지의 일출 시각을 맞출 수 없습니다."
이도가 눈을 깜빡였다.
"뭐?"
"황도경사각은 23도 30분이 아니라 23도 27분입니다. 3분의 오차가 하루 시각을 12분 어긋나게 만듭니다."
학자가 혼천의를 돌렸다. 청동 고리들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제자리를 찾았다.
"이 정도면 정확합니다."
이도는 멍하니 혼천의를 바라봤다. 학자의 계산이 맞았다. 그것도 단 몇 초 만에.
"그게 말이야..."
그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지금 엄청난 거 아니야? 3분 오차를 어떻게 그렇게 빨리 계산한 거야?"
"계산이 아닙니다. 관측입니다."
학자가 창밖을 가리켰다.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별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계산이 틀릴 뿐입니다."
이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궁궐의 학자들은 모두 책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이 학자는 달랐다. 별을 직접 읽고 있었다.
"네 이름이 뭐야?"
"하린입니다."
"하린? 성은?"
학자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 뭐, 나도 그런 거 안 따지는 편이니까."
이도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도야. 그냥 이도라고 불러."
하린이 그의 손을 바라봤다.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이도... 님."
"님은 빼. 우리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하지만..."
"아, 진짜. 격식 차리면 재미없잖아."
이도는 하린의 손을 흔들었다. 하린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냈다.
"죄송합니다. 저는... 격식을 지켜야 합니다."
"왜? 관상감 규칙?"
"제 규칙입니다."
하린이 몸을 돌렸다. 이도는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사람이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했다.
"그럼 오늘 밤 같이 관측할래? 나 혼자 하면 심심하거든."
하린이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관측은 혼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둘이 하는 게 더 좋던데."
"..."
하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도는 웃으며 혼천의 옆에 앉았다.
"뭐, 네가 싫다고 해도 나는 여기 있을 거니까. 방해 안 할게."
그날 밤, 두 사람은 말없이 별을 봤다. 이도는 간의를 조작하며 북두칠성의 위치를 기록했다. 하린은 두루마리에 빼곡하게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 Part 2/3: 전개
촛불이 짧아지고 있었다.
이도는 간의의 눈금을 조정하며 북두칠성의 세 번째 별을 관측했다. 손가락 끝이 차가운 청동에 닿을 때마다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집중이 안 돼.'
시선이 자꾸 옆으로 흘렀다.
하린은 여전히 두루마리에 숫자를 적고 있었다. 가는 붓끝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만이 고요를 채웠다. 이도는 슬쩍 고개를 돌려 하린의 손을 바라봤다.
'저렇게 빠르게 쓰는데 어떻게 글씨가 저렇게 반듯하지?'
하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응?"
"아까부터 계속 저를 보고 계십니다."
이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네가 뭘 계산하는지 궁금해서."
하린이 두루마리를 말았다.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동지의 일출 시각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건 알겠는데, 왜 하필 동지야? 지금 한여름인데."
"..."
하린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어둠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중요합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도는 하린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촛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지만, 눈동자 안은 어두웠다.
'뭔가 숨기고 있어.'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간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도 도와줄까? 동지 계산."
"필요 없습니다."
"왜? 둘이 하면 더 빠를 텐데."
"혼자 하는 게 정확합니다."
하린이 일어섰다. 두루마리를 품에 안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벌써? 아직 자정도 안 됐는데."
"충분히 관측했습니다."
이도가 황급히 일어섰다. 하린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 그럼 다음에는 언제 와?"
"다음은 없습니다."
"뭐?"
하린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도와의 거리를 벌렸다.
"저는 매일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만 옵니다."
"그럼 언제 필요한 건데?"
"..."
하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도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아, 진짜. 그렇게 혼자만 하면 뭐 해? 나도 별 보는 거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과 필요한 것은 다릅니다."
하린이 이도를 스쳐 지나갔다. 문을 열려는 순간, 이도가 다시 말을 걸었다.
"다음 보름날은 어때?"
하린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멈췄다.
"보름날?"
"응. 다음 보름날 밤에 북악산 정상에서 같이 별 보자. 여기보다 훨씬 잘 보여."
"..."
"그때 월식도 있잖아. 너도 알지?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거."
하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이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월식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하지. 나도 천문 공부 좀 했다고."
이도가 웃으며 가슴을 폈다.
"월식은 태양-지구-달이 일직선으로 놓일 때 일어나는 거야. 달이 지구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면서 붉게 보이는데, 그게 정말 장관이거든.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하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혼자 보기... 아깝다?"
"그럼. 그런 건 같이 봐야 더 좋잖아."
이도가 한 걸음 다가섰다. 하린이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어때? 올 거야?"
하린이 시선을 내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도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제발 오케이라고 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이 사람이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린이 입을 열었다.
"...가지 않겠습니다."
"왜?"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이유 없이 거절하는 거야?"
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빛이 이도를 관통했다.
"이유는 있습니다. 다만 말할 수 없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실례하겠습니다."
하린이 문을 열고 나갔다. 이도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야, 저 사람.'
답답했다. 궁금했다. 그리고 묘하게 가슴이 아팠다.
**
다음 날 밤, 이도는 다시 관상감을 찾았다.
하린은 없었다.
그다음 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사흘째 되던 날, 이도는 관상감 마당에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짜 안 오는 거야?"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보는 별은 예전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이상하네. 원래 혼자 보는 게 좋았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이도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하린이 담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왔어?"
이도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밝아졌다. 하린이 땅에 내려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이 끝나지 않아서 왔습니다."
"계산? 동지 일출?"
"...그렇습니다."
하린이 관측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도는 얼른 뒤따라갔다.
# Part 3/3: 위기-클리프행어
하린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빼곡한 숫자들 사이로 붉은 먹으로 그어진 선이 보였다. 이도는 그 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이게 뭐야?"
"궤도입니다."
"무슨 궤도?"
하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이 늦어졌다.
"...별의 궤도입니다."
이도가 두루마리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계산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이거..."
그의 손가락이 숫자 하나를 짚었다.
"이 날짜, 다음 보름 아니야?"
하린의 손이 떨렸다.
"...그렇습니다."
"왜 하필 그날?"
"계산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무슨 계산?"
하린이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안았다. 이도에게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야, 하린아."
이도가 하린의 팔을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너 지금 뭘 숨기고 있어?"
하린이 팔을 빼냈다.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대지 마십시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도는 그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다. 두려움? 아니면 슬픔?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어?"
"잘못한 게 아닙니다."
하린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뭐가?"
대답이 없었다.
이도는 답답한 마음에 한 걸음 다가섰다. 하린이 벽에 등을 붙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하린아, 나한테 말해봐. 뭐가 문제야?"
"말할 수 없습니다."
"왜?"
"말하면..."
하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하면 모든 게 틀어집니다."
이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뭔가 큰일이 일어날 거야.'
본능이 속삭였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럼 나도 같이 틀어지면 되잖아."
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말씀을..."
"혼자 감당하지 마. 나도 도울 수 있어."
"도울 수 없습니다."
"왜?"
하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이도 님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소리야?"
"이곳은 위험합니다. 제 곁은 더 위험합니다."
"그게 무슨..."
"제발."
하린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다음 보름날, 오지 마십시오."
이도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이렇게까지?'
가슴이 답답했다.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너 지금 날 피하는 거야?"
"..."
"왜? 내가 싫어?"
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싫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래서입니다."
이도의 눈이 커졌다.
하린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이도가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기다려. 나 아직 할 말..."
"놓으십시오."
하린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하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도는 그 떨림을 느꼈다. 손아귀에 힘을 뺐다.
하린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
보름이 다가왔다.
이도는 궁궐 담을 넘어 북악산으로 향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올까?'
오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산 정상에 올랐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도는 바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역시 안 왔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시간이 흘렀다.
달이 중천에 떴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이도가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하린이 숨을 헐떡이며 산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왔어?"
이도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이도 옆에 섰다.
"월식 곧 시작해. 봐."
이도가 하늘을 가리켰다. 달 가장자리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지구 그림자가 달을 덮는 거야. 완전히 가려지면 달이 붉게 보일 거고."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하린이 달을 보고 있었다. 아니, 달 너머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야, 하린아."
"..."
"왜 그래? 어디 아파?"
하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더 이상 이곳에 올 수 없습니다."
이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무슨 일이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 진짜. 또 그 소리야?"
이도가 다가서려 했다. 하린이 한 걸음 물러섰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목소리가 떨렸다.
이도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이 창백했다.
"너 지금 우는 거야?"
"...아닙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울고 있었다.
이도의 가슴이 조였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유성이 아니었다. 혜성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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