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말하지 않은 것
주인공: 이도
서고의 먼지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도는 재채기를 참으며 책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관상감 서고는 언제나 이랬다. 낡은 종이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숨 쉬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하린이 어디 갔다는 거야."
아침부터 관상감을 찾았건만 하린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관원들에게 물어봐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붉은 빛. 분명 뭔가 있어.'
어젯밤 하늘을 가른 그 섬광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린이라면 분명 그것도 봤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이미 계산을 끝냈을지도 몰랐다.
책장 맨 위 선반에 시선이 닿았다.
다른 책들과 달리 깨끗한 천으로 감싼 두루마리 하나가 보였다. 이도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발끝을 세우고 간신히 손끝이 닿았을 때, 두루마리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앗!"
바닥에 굴러떨어진 두루마리가 스르륵 펼쳐졌다.
이도는 무릎을 꿇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필체였다. 하린의 글씨. 빼곡하게 적힌 계산식들 사이로 별자리 그림이 보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건...'
붉은 별의 예언이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떨렸다. 천문도 한가운데, 붉게 표시된 별 하나가 어떤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는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끝에 적힌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 죽음.
그런데 그 옆에 적힌 이름이 이상했다.
'왕자... 가 아니라?'
학자 하린.
"뭐야, 이게."
이도는 두루마리를 바닥에 펼쳐놓고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었다. 계산식은 복잡했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붉은 별이 특정 위치에 도달하는 날, 누군가 죽는다. 그리고 그 대상은 왕자가 아니라 하린이었다.
계산식 여백에 하린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다.'
"아, 진짜!"
이도는 두루마리를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뭐야. 날 속인 거야?'
왕자가 죽는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다. 하린은 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왜..."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말 안 한 거야.'
가슴속이 답답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도는 두루마리를 다시 펼쳤다. 혹시 자기가 잘못 본 건 아닐까. 다시 봐도 똑같았다. 학자 하린. 죽음.
발소리가 들렸다.
이도는 화들짝 놀라 두루마리를 품에 넣었다. 서고 입구 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누구십니까?"
낯선 목소리였다.
이도는 재빨리 책장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이도는 조심스럽게 서고를 빠져나왔다.
***
밤이 깊어갈수록 불안이 커졌다.
이도는 하린의 거처 앞에 서 있었다. 작은 초가 한 채. 관상감 뒤편 구석진 곳에 자리한 초라한 집이었다.
"하린아."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나야, 이도. 문 좀 열어봐."
여전히 조용했다.
이도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안에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도망간 건 아니겠지.'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왕자 마마."
이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민지훈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관복 차림이었지만, 표정은 차가웠다.
"이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민지훈의 목소리는 공손했지만 날카로웠다.
이도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냥... 산책."
"관상감 뒤편까지 산책을 오시다니, 참 부지런하십니다."
민지훈은 한 걸음 다가왔다.
"요즘 왕자 마마께서 관상감에 지나치게 자주 출입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
"궁궐 안팎으로 좋지 않은 소문이 돕니다. 왕자께서 천문학에 빠져 정무를 소홀히 하신다고."
이도는 코웃음을 쳤다.
"정무? 나한테 무슨 정무가 있다고."
"왕자이시니 당연히 있습니다."
민지훈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학자 하린을 찾으러 오신 겁니까?"
심장이 철렁했다.
"그건... 뭐..."
말끝을 흐렸다. 민지훈은 이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그 학자, 정말 남자가 맞습니까?"
순간 숨이 멎었다.
'이 사람이 뭘 알고 있는 거야?'
이도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연히 남자지."
"그렇습니까."
민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믿지 않는다는 듯했다.
"왕자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런가 봅니다. 다만..."
민지훈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혹시라도 뭔가 숨기고 계신 게 있다
# Part 2: 전개
민지훈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도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등 뒤로 하린의 거처 문이 닿았다.
"숨기는 것? 그게 무슨..."
"왕자 마마."
민지훈이 말을 끊었다.
"신은 오늘 아침 관상감 서고에 다녀왔습니다."
가슴이 철컥 내려앉았다.
'설마.'
"거기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붉은 별의 예언을 다룬 천문도가 사라졌더군요."
민지훈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혹시 왕자 마마께서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이도는 품속의 두루마리가 뜨겁게 느껴졌다. 들키면 안 된다. 하린을 지켜야 한다.
"몰라. 나도 오늘 서고에 갔었는데 아무것도 못 봤어."
"그렇습니까."
민지훈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런데 왜 이 밤중까지 학자 하린의 거처를 찾아오셨습니까?"
"그건..."
말문이 막혔다.
민지훈은 이도를 지나쳐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 있군요.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러게. 난 그냥 지나가다가..."
"지나가다가?"
민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관상감 뒤편 구석까지 지나가실 일이 있으십니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민지훈은 문에서 손을 떼고 이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신이 듣기로는, 학자 하린이 사흘째 관상감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
"왕자 마마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이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었지. 그래서 찾아다닌 거잖아.'
하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민지훈 앞에서 하린을 걱정한다는 걸 들키면 안 됐다.
"몰랐어.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렇습니까."
민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왕자 마마께서도 이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민지훈이 돌아섰다.
이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품속의 두루마리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민지훈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
다음 날 해질녘.
이도는 궁궐 뒤뜰을 서성였다. 하린이 자주 오던 곳이었다. 별을 보기 좋다며 이곳에서 혼자 밤을 지새우곤 했다.
'오늘은 올까.'
품속에는 여전히 하린의 천문도가 들어 있었다. 밤새 들여다봤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계산식뿐이었다.
'학자 하린의 죽음.'
그 글자만은 또렷했다.
"왜 말 안 한 거야..."
중얼거렸을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이도는 화들짝 돌아봤다.
하린이었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평소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눈 밑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린아!"
이도가 달려가려는 순간, 하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목소리가 떨렸다.
이도는 발을 멈췄다.
"너... 어디 갔었어? 사흘이나 안 보이길래..."
"그건 왕자님께서 아실 필요 없습니다."
하린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저를 찾지 마십시오."
"뭐?"
이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그래?"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도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거. 네가 쓴 거지?"
하린의 눈이 커졌다.
"그건..."
"봤어. 다 봤어."
이도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거짓말했어?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그게 끝이야?"
이도가 소리쳤다.
"너 죽는다며!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말씀드리면... 왕자님께서 저를 구하려 드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
"그리고 그것은..."
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도는 할 말을 잃었다.
하린은 눈물을 닦았다.
"붉은 별의 예언은 왕실에 금기입니다. 그것을 본 자는 역모로 몰려 죽습니다. 왕자님께서 저를 돕는다면..."
"그럼 어쩌라고."
이도가 다가갔다.
"그냥 죽으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그것이 제 운명입니다."
"운명? 그게 말이야..."
이도는 두루마리를 움켜쥐었다.
"별이 그렇다고 해서 다 믿어야 돼? 바꿀 수 있잖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별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계산한 날짜는 보름 후입니다. 그날이 오면..."
"아냐."
이도가 하린의 손을 잡았다.
"난 안 믿어. 네가 죽는다는 거, 절대 안 믿어."
하린은 손을 빼려 했지만 이도가 놓아주지 않았다.
"왕자님."
"이도야. 그냥 이도라고 불러."
"...이도님."
하린의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제발 저를 놓아주십시오. 이제 정말 끝입니다."
그때였다.
# Part 3: 위기-클리프행어
"이제 정말 끝입니다."
하린이 손을 빼냈다.
이도는 멍하니 제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 사이로 하린의 온기가 빠져나갔다.
"더 이상 저를 찾지 마십시오."
하린이 돌아섰다.
"잠깐!"
이도가 앞을 막아섰다.
"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그게 네 말이었잖아."
"...그렇습니다."
"그럼 왜."
이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왜 당신은 거짓말을 했소?"
하린의 발걸음이 멎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달빛이 그녀의 어깨를 비췄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별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린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이도의 입이 벌어졌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워졌다.
'사랑하는 사람.'
하린이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심장이 두드렸다. 귀가 먹먹했다.
하린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이도는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 한가운데 붉은 별이 떠올랐다. 예언의 별. 죽음을 알리는 별.
품속의 두루마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보름 후.'
숨이 가빠졌다.
***
다음 날 새벽.
이도는 관상감 앞에 서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열어!"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학자 하린 어디 있어! 나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도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꿈쩍하지 않았다.
"아, 진짜!"
발로 문을 찼다. 쿵쿵 소리가 울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왕자 마마."
민지훈이었다.
이도는 돌아봤다. 민지훈은 여느 때와 같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달랐다.
"새벽부터 소란이 심하십니다."
"비켜. 지금 바빠."
"무엇이 그리 급하십니까?"
민지훈이 한 걸음 다가왔다.
"혹시 학자 하린을 찾으시는 겁니까?"
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지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타깝게도 학자 하린은 오늘 아침 관상감에서 파면되었습니다."
"뭐?"
"신이 직접 처리했습니다. 붉은 별의 예언을 무단으로 기록한 죄목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왕자 마마께서는 모르셨습니까?"
민지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붉은 별의 예언은 왕명으로 금지된 천문입니다. 그것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역모죠."
"역모라니, 그건 너무..."
"법이 그렇습니다."
민지훈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학자 하린이 작성한 천문도가 서고에서 사라졌더군요."
이도는 품을 감쌌다.
민지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왕자 마마, 혹시 그 천문도를 가지고 계십니까?"
"없어."
"그렇습니까."
민지훈은 웃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그럼 신이 왕자 마마의 처소를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뭐?"
"천문도는 왕실의 기밀입니다. 분실된 것을 찾는 건 신의 의무죠."
이도는 뒤로 물러섰다.
민지훈이 따라왔다.
"왕자 마마."
목소리가 낮아졌다.
"신은 알고 있습니다. 왕자께서 그 학자와 어떤 관계이신지."
"무슨 소리야."
"부정하지 마십시오."
민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학자 하린의 거처에서 여인의 옷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숨이 멎었다.
"그리고 왕자께서 밤마다 그 학자를 찾아다니셨다는 증언도 충분합니다."
민지훈이 손을 뻗었다.
"천문도를 내놓으십시오. 그리고 학자 하린이 어디 있는지 말씀하십시오."
이도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없다니까."
"거짓말입니다."
민지훈의 손이 이도의 품으로 향했다.
이도가 그 손을 쳐냈다.
"손대지 마!"
"왕자 마마!"
민지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신을 거역하시는 겁니까?"
"네가 감히 왕자한테!"
이도가 소리쳤다.
민지훈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곧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신이 실례했습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왕자 마마."
민지훈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왕실의 법도는 왕자라 해도 어길 수 없습니다. 천문도를 숨기고 역모자를 비호하시는 것은..."
"역모자?"
이도가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하린이 무슨 역모를 했다고?"
"붉은 별의 예언을 기록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민지훈은 고개를 숙였다.
"왕자께서 계속 거부하신다면, 신은 대전께 이 사실을 아뢰어야 합니다."
"아버지한테?"
"그렇습니다."
민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왕자께서 역모자를 비호하고 계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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