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의 거래
주인공: 이서연
환기구 덮개가 떨어졌다.
서연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문은 있잖아요."
"감시 카메라가 127개입니다."
천장에서 내려온 건 사람이 아니었다. 팔이 여섯 개 달린 곤충 형태. 관절마다 렌즈가 박혀 있었다. 제론-9이었다.
"급한 용건입니다, 예언자님."
"그 호칭 쓰지 말라고 했어요."
서연은 여전히 창밖만 보고 있었다. 은하수가 보라색이었다. 지구에선 본 적 없는 색.
제론-9의 다리 하나가 바닥에 닿자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DNA 이중나선 구조. 그 옆에 빽빽한 숫자들.
"5천 년 전 기록입니다. 당신의 유전자 선택 과정이요."
"...관심 없어요."
"조작되었습니다."
서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무릎 위에 올려둔 채로.
제론-9은 홀로그램을 확대했다. 수천 개의 DNA 샘플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졌다. 그중 하나에 붉은 테두리.
"초기 탐사대는 12,847개의 인간 샘플을 발견했습니다. 그중 당신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다른 파일을 열었다. 회의록이었다. 5천 년 전 외계 문자로 빼곡했지만, 번역기가 실시간으로 한글을 띄웠다.
'가장 평범한 개체를 선택할 것. 특출난 재능이나 결함이 없는 빈 서판이 필요하다. 신화는 백지에서 시작된다.'
서연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빈 서판?"
"신으로 만들기 쉬운 캔버스였습니다. 당신이요."
뭔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웃음인지 비명인지 구분이 안 됐다.
"12 조회수 받은 게 평범해서였구나."
"예언자님..."
"그 호칭 진짜 듣기 싫다니까요."
서연은 일어섰다.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저 멀리 중앙 광장의 홀로그램 기둥이 보였다. 9,274경 개체가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뭔가 특별해서 선택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어서였다.
제론-9이 다가왔다. 여섯 개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
"거래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거래요?"
"새 영상을 만들어주세요. 당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메시지를요."
서연이 돌아봤다.
"의회가 알면 당신 죽어요."
"압니다."
"그럼 왜요?"
제론-9의 렌즈들이 일제히 서연을 향했다. 127개 눈동자.
"5천 년간 잘못된 해석을 기록해왔습니다. 당신의 '월요일 라면 먹방'을 두고 137개 문명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23억이 죽었습니다. 라면 때문에요."
"..."
"이건 바로잡아야 합니다."
서연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3천 년 전 느낌. 편집본을 엎어버리던 그때.
'틀린 건 참을 수가 없어.'
"...장비는요?"
제론-9이 벽을 터치하자 숨겨진 공간이 열렸다. 최첨단 촬영 장비가 빼곡했다. 카메라, 조명, 마이크. 지구 기술보다 5천 년 앞선.
"은하계 전역 송출 권한도 확보했습니다. 내일 설교 시간에 이걸 대신 송출하면 됩니다."
"거절하면요?"
"당신은 평생 꼭두각시로 살게 됩니다. 칼레온이 쓴 대본을 읽으면서요."
서연이 장비 앞으로 걸어갔다. 카메라를 들어봤다. 가벼웠다. 손에 딱 맞았다.
'3천 년 만이네.'
뷰파인더를 들여다봤다. 자기 얼굴이 보였다. 초점이 또렷했다.
"...이거 프리미어 프로 아니잖아요."
"은하 표준 편집 프로그램입니다. 인터페이스는 유사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서연이 노트북을 켰다. 아니, 노트북처럼 생긴 뭔가를. 화면이 공중에 떴다. 타임라인, 트랙, 이펙트 패널. 배치는 비슷했지만 버튼이 5천 개는 더 많았다.
"...미쳤네."
"튜토리얼이 필요하십니까?"
"아뇨."
서연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클릭, 드래그, 단축키. 3천 년 전 근육이 기억하고 있었다.
제론-9은 모든 움직임을 기록했다. 예언자의 창조 과정. 신성한 의식.
"주제는 뭘로 하실 겁니까?"
서연이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했다. 조명을 켰다. 의자에 앉았다.
"...해명이요."
"해명이라니요?"
"라면은 그냥 라면이에요. 월요일은 그냥 월요일이고요. 별 의미 없어요."
녹화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서연은 카메라를 똑바로 봤다. 3천 년 전처럼.
"안녕하세요. 이서연입니다. 여러분이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요."
제론-9의 렌즈 하나가 흔들렸다.
"5천 년 동안 제 영상 해석하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근데 다 틀렸어요."
담담했다. 감정 없이.
"라면 먹방은 그냥 배고파서 찍은 거예요. 월요일이 우울한 건 출근해야 해서고요. 심오한 의미 같은 거 없어요."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펼쳤다.
"첫째, 라면은 신성한 제물이 아니에요. 그냥 밀가루 면이에요. 둘째, 월요일은 시간의 순환이 아니라 주말이 끝난 거예요. 셋째..."
5분간 쉬지 않고 말했다. 12개 영상을 하나씩 해명했다. 조회수 12 받았던 그 영상들을.
"...
# Part 2/3: 전개
"...그러니까 제발 전쟁 좀 그만하세요."
녹화 중지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이 꺼졌다.
서연은 화면을 재생했다. 자기 얼굴이 떴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5분간 팩트만 나열하는 모습.
"...이거 재미없는데요."
"재미가 필요합니까?"
"조회수 12 받은 이유를 모르세요?"
제론-9의 렌즈가 깜빡였다.
서연은 타임라인을 다시 열었다. 영상을 0.1초 단위로 쪼갰다. 말 더듬은 부분, 눈동자 흔들린 프레임, 어색하게 웃은 컷.
"다시 찍어야 해요."
"시간이 없습니다. 6시간 후면 설교가 시작됩니다."
"그럼 6시간 동안 찍으면 되죠."
삭제 버튼을 눌렀다. 5분짜리 영상이 사라졌다.
제론-9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렌즈 127개가 전부 서연을 향했다. 관찰 모드.
두 번째 테이크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이서연입니다."
목소리 톤이 달랐다. 조금 더 낮게.
"여러분이 5천 년 동안 믿어온 게 있잖아요. 근데 그게..."
말끝을 흐렸다. 카메라를 보다가 시선을 살짝 떨궜다.
"...아니에요."
녹화 중지.
"이것도 아니네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진심이 안 보여요."
"당신은 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심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한 거예요."
서연은 조명 각도를 3도 틀었다. 그림자가 얼굴 왼쪽에 생겼다.
세 번째 테이크.
네 번째.
열두 번째.
새벽 2시가 됐다. 바닥에 에너지바 포장지가 스물일곱 개 굴러다녔다.
"...한 번만 더요."
"예언자님, 당신은 4시간째 같은 대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미세하게 달라요."
"0.3초 차이입니다."
"그 0.3초가 전부예요."
서연은 스물여덟 번째 녹화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자신이 말했다. "라면은 그냥 라면이에요." 이번엔 '그냥' 앞에 0.2초 쉼이 들어갔다.
재생을 멈췄다.
"...됐어요."
"확신하십니까?"
"아뇨. 근데 시간이 없잖아요."
타임라인에 스물여덟 개 클립이 쌓여 있었다. 서연은 그중 열일곱 개를 골라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컷 A에서 '안녕하세요'를 따고, 컷 F에서 '이서연입니다'를 붙였다. 컷 Q의 눈 깜빡임과 컷 C의 손동작을 조합했다.
"...당신은 영상을 조각내서 재조립하고 있습니다."
"편집이 그런 거예요."
"하지만 이건 거짓 아닙니까?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
"영상은 원래 거짓말이에요."
서연의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드래그, 컷, 복사, 붙여넣기. 3천 년 전 근육이 완전히 깨어났다.
제론-9은 기록했다. '예언자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조립한다.'
새벽 4시 13분.
영상이 완성됐다. 정확히 4분 47초. 썸네일은 서연이 정면을 보며 미소 짓는 장면. 어색하지만 진심처럼 보였다.
제목을 입력했다.
'여러분, 제가 설명할게요'
업로드 창이 떴다. 예상 도달 범위가 실시간으로 계산됐다.
137개 문명권.
9,274경 6,381조 개체.
은하계 전 네트워크 동시 송출.
서연의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조회수 12.'
3천 년 전 숫자가 떠올랐다. 72시간 동안 새로고침을 5,847번 눌렀다. 12에서 13으로 안 올라갔다.
'이번엔 12조야.'
손이 떨렸다. 마우스를 잡은 손가락 끝에서 땀이 났다.
"...올리면 어떻게 돼요?"
"137개 문명의 신앙 체계가 붕괴합니다."
"그다음은요?"
"혼란이 올 겁니다. 어쩌면 전쟁도요."
"제론-9은요?"
"처형당할 겁니다. 반역죄로요."
서연이 그를 봤다. 여섯 개 다리, 127개 렌즈. 5천 년 동안 거짓을 기록해온 존재.
"...후회 안 해요?"
"기록자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만 수정합니다."
커서가 업로드 버튼 위에 올라갔다. 클릭하면 끝이었다.
홀로그램 구석에 작은 글씨가 떴다.
'발신자 추적 불가 모드 - 활성화 가능'
"이거 뭐예요?"
"익명 송출입니다. 출처를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럼 제론-9은 안 죽는 거예요?"
"아닙니다. 장비 사용 기록은 남습니다. 다만 당신의 관여는 숨길 수 있습니다."
서연의 손가락이 1mm 떨어진 채 공중에 떠 있었다.
'누르면 혼란. 안 누르면 거짓.'
둘 다 틀렸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없습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무거운 걸음. 여러 명.
제론-9의 렌즈 하나가 문 쪽을 향했다.
"칼레온입니다. 호위대 12명과 함께요."
"지금요? 새벽 4시에요."
"설교 리허설 시간입니다. 예정보다 2시간 앞당겨졌습니다."
노크 소리.
"예언자님, 계십니까?"
칼레온의 목소리였다. 공손했지만 거부권은 없었다.
서연은 화면을 봤다. 업로드 버튼. 그 옆에 '임시저장' 버튼.
"예언자님?"
노크가 거세졌다.
제론-9이 속삭였다.
"지금 누르세요.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습니다."
# Part 3/3: 위기-클리프행어
서연의 검지가 '임시저장'을 눌렀다.
파일이 사라졌다. 화면이 꺼졌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칼레온이 먼저 들어왔다. 뒤로 호위대 12명. 전부 무장했다.
"새벽 리허설이라니, 갑자기 왜요?"
"의회 결정입니다."
칼레온의 시선이 바닥을 훑었다. 에너지바 포장지 스물일곱 개. 삼각대. 꺼진 조명.
"...촬영하셨습니까?"
"못 자서 셀카 찍었어요."
"보여주시겠습니까?"
"삭제했어요. 못생겨서."
칼레온이 제론-9을 봤다. 127개 렌즈가 일제히 바닥을 향했다.
"기록자, 보고하십시오."
"예언자님은 4시간 동안 명상하셨습니다."
"명상 중에 장비를 사용합니까?"
"...개인 기록용입니다."
칼레온의 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무기가 아니라 스캐너였다. 붉은 빛이 방 안을 훑었다.
"최근 1시간 내 데이터 송출 기록이 있습니다."
"테스트했어요. 화질 확인용."
"어디로 송출하셨습니까?"
"...로컬 서버요."
스캐너의 빛이 노트북에 멈췄다. 아니, 노트북처럼 생긴 뭔가에.
"저걸 압수하겠습니다."
제론-9의 다리 하나가 미세하게 떨렸다. 0.03초. 서연만 알아챘다.
'임시저장 파일이 저기 있어.'
"안 돼요."
"예언자님?"
"제 사적인 기록이에요. 신성 모독 아니에요?"
칼레온이 멈칫했다. 호위대도 함께.
서연은 노트북 앞으로 걸어갔다. 손을 올렸다.
"제가 직접 지울게요. 보는 건 안 돼요."
"의회 명령입니다."
"의회가 신보다 위예요?"
정적.
칼레온의 손이 스캐너에서 떨어졌다. 호위대가 반걸음 물러났다.
'먹혔네.'
서연은 노트북을 켰다. 화면이 떴다. 파일 목록이 보였다.
'여러분, 제가 설명할게요 - 임시저장본.final.ver28'
삭제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제론-9의 렌즈 하나가 서연을 향했다. 127개 중 단 하나.
'지우지 마세요.'
소리 없는 신호였다. 렌즈의 떨림으로.
서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시간 좀 주세요. 파일이 많아서요."
"30초 드리겠습니다."
칼레온이 타이머를 켰다. 홀로그램 숫자가 거꾸로 돌아갔다.
29.
28.
서연은 파일을 열었다. 영상이 재생됐다. 음소거 상태로.
화면 속 자신이 말하고 있었다. 입모양만 보였다.
'라면은 그냥 라면이에요.'
27.
26.
손가락이 타임라인을 훑었다. 4분 47초짜리 영상. 스물여덟 개 테이크를 이어붙인.
'이거 지우면 끝이야.'
25.
"예언자님, 서두르십시오."
24.
서연의 시선이 제론-9에게 갔다. 여섯 개 다리. 5천 년 동안 거짓을 기록한 존재.
'쟤는 왜 날 도와줘?'
23.
렌즈 하나가 또 떨렸다. 이번엔 다른 신호.
'당신이 결정하세요.'
22.
서연은 화면을 봤다. 삭제 버튼. 그 옆에 '전송' 버튼.
21.
'누르면 혼란. 안 누르면 거짓. 둘 다 틀렸어.'
20.
손가락이 세 번째 버튼으로 갔다. '예약 송출'.
19.
클릭했다. 새 창이 떴다.
'송출 시간 설정: 수동 입력'
18.
"10초 남았습니다."
17.
서연은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날짜가 아니라 조건을.
'송출 조건: 발신자 사망 시 자동 활성화'
16.
15.
"예언자님?"
14.
엔터를 눌렀다. 파일이 암호화됐다. 잠금 아이콘이 떴다.
13.
화면을 껐다. 칼레온을 봤다.
"...지웠어요."
"확인하겠습니다."
칼레온이 다가왔다. 노트북을 가져갔다. 스캐너로 훑었다.
"최근 파일 삭제 기록 없습니다."
"캐시 삭제했거든요."
"..."
칼레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복도로 나갔다. 호위대가 양옆을 에워쌌다.
제론-9도 따라왔다. 여섯 개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기록자는 예언자와 항상 동행한다.'
규칙이었다. 5천 년 된.
엘리베이터에 탔다. 299층에서 1층으로. 3분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서연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피가 날 만큼.
'발신자 사망 시 자동 활성화.'
그 말은.
'내가 죽으면 영상이 퍼진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대성전이었다. 천장이 안 보일 만큼 높았다. 좌석이 10만 개. 전부 비어 있었다.
단 한 명만 앉아 있었다. 맨 앞줄 정중앙.
칼레온이 무릎을 꿇었다. 호위대도 함께.
"대의장님."
그가 일어났다. 키 3미터. 피부는 반투명했다. 혈관이 빛처럼 흘렀다.
"이서연."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스피커 없이.
"...네."
"5천 년 만이로구나."
서연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이 사람, 날 알아?'
대의장이 걸어왔다. 한 걸음에 5미터씩.
"네가 영상을 올렸을 때 나도 봤다. 조회수 12 중 하나가 나였지."
"..."
"월요일 라면 먹방. 재미있더구나."
그가 웃었다.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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