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약 14분 · 총 7,063자

도파민 러브레터

주인공: 강민준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민준은 베개로 머리를 덮었다. 소용없었다. 폰이 침대 틈새에서 미친 듯이 떨어댔다.

"아 진짜..."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 우진이었다. 당연히.

'형! 오늘 3건 잡혀있어~♥'

민준은 폰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대신 이불을 걷어찼다.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3건. 또.'

옷장 앞에 섰다. 거울 속 남자가 민준을 바라봤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중얼거렸지만 손은 이미 옷걸이를 집고 있었다. 네이비 셔츠. 베이지 치노팬츠. 무난한 조합. 소개팅 유니폼이었다.

3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빗속에서 쓰러진 우진. 피투성이 얼굴. 구급차 사이렌.

'형, 나 죽는 거 아니지?'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

첫 번째 데이트 장소는 홍대 카페였다.

상대는 정장을 입은 여자였다. 명함부터 내밀었다.

"김서연이에요. 외국계 컨설팅 회사 다니고 있어요."

"아, 네. 강민준입니다."

"MBTI는요?"

"...ISTJ요."

"완벽해요. 저도 IJ예요. 계획형끼리 잘 맞거든요."

민준은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갔다.

서연은 30분 동안 자기 회사 이야기를 했다. 프로젝트, 승진, 5개년 계획.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혀에 남았다.

"민준 씨는 어떤 비전을 갖고 계세요?"

"비전이요?"

"네. 5년 후 자신의 모습이요."

민준은 잠시 멈췄다. 5년 후? 지금 당장 내일도 모르겠는데.

"...아직 구체적으론 못 세웠어요."

서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럼 목표 같은 건요?"

"목표..."

'살아남기?'

속으로 삼켰다.

"천천히 찾아가는 중이에요."

"아."

서연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대화가 끊겼다. 민준은 시계를 봤다. 11시 20분. 다음 약속까지 40분.

***

두 번째는 신촌 브런치 카페였다.

상대는 파스텔톤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이름은 지유. 목소리가 높았다.

"오빠~ 여기 팬케이크 완전 유명한 데래요~!"

"아 그래요?"

"네~ 인스타에서 봤는데 진짜 예쁘더라구요~"

지유는 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팬케이크, 커피, 창밖 풍경. 민준도 찍혔다.

"오빠 얼굴 진짜 잘 받네요~"

"...감사합니다."

민준은 팬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았다. 너무 달았다.

지유는 30분 동안 자기 고양이 이야기를 했다. 민준은 맞장구를 쳤다. '그렇구나', '귀엽네요', '대단해요'.

자동 재생이었다.

***

세 번째는 강남 서점 카페였다.

상대는 안경을 쓴 여자였다. 이름은 수진. 민준이 앉자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

수진은 다시 책을 봤다. 민준은 메뉴판을 집었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수진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5분이 지났다. 수진이 책장을 넘겼다.

10분이 지났다. 민준은 커피를 다 마셨다.

15분이 지났다. 민준이 입을 열었다.

"무슨 책 읽으세요?"

"...소설이요."

"아, 재밌어요?"

"네."

또 침묵이었다.

민준은 창밖을 봤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웃고 떠들고 걸어갔다. 민준만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손끝이 저렸다.

***

저녁 7시.

민준은 한강변 카페로 걸어갔다.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오늘로 끝이다.'

다짐했다. 내일은 우진한테 진짜 거절한다. 더 이상 못 하겠다고.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창가 자리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긴 생머리. 회색 니트. 창밖을 보고 있었다.

민준이 다가가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강민준 씨죠?"

"네."

민준은 맞은편에 앉았다. 여자가 민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오늘 몇 번째 소개팅이에요?"

민준은 멈칫했다.

"...세 번째요."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거짓말."

"네?"

"눈이 피곤해 보여요. 최소 다섯 번은 넘겼죠?"

민준은 할 말을 잃었다. 여자는 턱을 괴며 말했다.

"저는 이하늘이에요. 근데 여기서 커피 마시긴 싫은데."

"...네?"

"산책 어때요?"

하늘은 일어섰다. 민준은 멍하니 따라 일어났다.

***

한강변은 조용했다.

바람이 불었다. 하늘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민준 씨."

"네."

"오늘 왜 나왔어요?"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늘이 빌딩을 가리켰다.

"저 불빛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이잖아요."

"...그렇죠."

"근데 우린 왜 남의 기준에 맞춰 사는 걸까요?"

민준은 멈춰 섰다. 하늘도 멈췄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민준이 물었다. 하늘이 웃었다.

"중요하죠.

# Part 2/3: 전개

"중요하죠. 안 그러면 우리 다 똑같은 사람이 되잖아요."

하늘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였다.

민준은 대답 대신 걸었다. 발밑에 자갈이 부스럭거렸다.

"민준 씨는 어때요? 오늘 만난 사람들 중에 진짜 대화한 사람 있어요?"

"...글쎄요."

"없죠."

하늘이 단정 지었다. 민준은 뒤통수가 따끔했다.

"어떻게 알아요?"

"눈이요. 민준 씨 눈이 계속 다른 데 가 있었어요."

"아."

할 말이 없었다. 하늘이 난간에 기댔다.

"저도 그래요. 소개팅 나오면 상대가 뭐 먹는지, 뭐 입는지만 보게 돼요. 정작 그 사람은 안 보이죠."

"그럼 왜 나와요?"

민준이 물었다. 하늘이 피식 웃었다.

"궁금해서요. 오늘은 어떤 사람일까. 혹시 다를까."

"다른 사람이요?"

"네. 소개팅 말고 그냥...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

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어딘가가 콕 찔렸다.

***

둘은 벤치에 앉았다.

하늘이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냈다.

"하나 드릴래요?"

"...감사합니다."

민준이 캔을 받았다. 차가웠다. 손바닥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근데 민준 씨."

"네."

"오늘 진짜 몇 번째예요?"

민준은 캔을 뜯다 말고 멈췄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표정이요. 웃는데 눈이 안 웃더라고요."

민준은 캔을 내려다봤다. 자기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

"네 번째요."

"와."

하늘이 감탄했다.

"그럼 저 포함하면 다섯?"

"...네."

"미쳤네요."

하늘이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었다. 그냥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많이 해요?"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캔을 땄다. 쉭 소리가 났다.

"빚이요."

"네?"

"친구한테 빚이 있어요."

하늘이 고개를 갸웃했다.

"돈이요?"

"아뇨. 그것보다 더 무거운 거."

민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3년 전에 걔가 사고를 당했어요. 차에 치였는데 운전자가 도주했죠."

"...아."

"병원비가 2천만 원 나왔어요. 걔 부모님은 안 계시고. 그래서 제가 냈어요."

하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소개팅을요?"

"걔가 은혜 갚겠다고. 자기가 소개팅 주선해줄 테니까 나가기만 하래요. 매일."

"...그게 말이 돼요?"

하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은혜 갚기가 아니라 착취잖아요."

민준은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갔다.

"그렇죠. 근데 거절을 못 하겠어요."

"왜요?"

"걔가 죽을 뻔했거든요. 제 앞에서."

민준의 손이 떨렸다. 캔이 흔들렸다.

"그날 밤에 걔가 울면서 그랬어요. '형, 나 죽는 거 아니지?' 그 목소리가 자꾸 들려요."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만 불었다.

***

잠시 후.

하늘이 입을 열었다.

"민준 씨는 착하네요."

"...착한 게 아니에요. 그냥 비겁한 거죠."

"비겁?"

"네. 거절하면 제가 나쁜 사람 같아서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

하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친구 분이 나쁜 거예요."

"아니에요."

민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진이는 착한 애예요. 그냥... 제가 약한 거죠."

하늘은 민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눈빛이 복잡했다.

"민준 씨."

"네."

"오늘 저랑 만나서 어때요?"

민준은 멈칫했다. 하늘의 눈이 반짝였다.

"솔직하게요."

민준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좋아요."

"왜요?"

"처음이에요. 이렇게 얘기해본 게."

하늘이 빙그레 웃었다.

"저도요."

***

시간이 흘렀다.

둘은 강변을 따라 걸었다. 말없이. 그냥 걸었다.

민준은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다. 웃어야 한다는 의무도 없었다.

그냥 걸으면 됐다.

하늘이 먼저 멈췄다.

"민준 씨."

"네."

"내일 또 만날래요?"

민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일?'

머릿속에 우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형, 규칙 있잖아. 한 사람당 딱 하루만. 그래야 다음 사람한테 예의지.'

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늘이 고개를 갸웃했다.

"...싫어요?"

"아니요!"

민준이 급하게 말했다.

"좋아요. 내일 만나요."

하늘의 얼굴이 환해졌다.

"진짜요?"

"네. 진짜요."

둘은 연락처를 교환했다. 민준은 하늘의 번호를 저장하며 손이 떨렸다.

'이번엔 달라. 이번엔 진짜야.'

속으로 다짐했다.

***

집 앞까지 하늘을 바래다줬다.

하늘이 현관문 앞에서 돌아섰다.

"오늘 고마웠어요."

"저야말로요."

"민준 씨."

"네."

"내일 꼭 연락해요."

"네. 할게요."

하늘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민준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뭔가 더 깊은 곳이 울렸다.

'이게 설렘인가.'

오랜만이었다.

# Part 3/3: 위기-클리프행어

민준은 침대에 쓰러졌다.

별 모양으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 진짜 미치겠네.'

온몸이 무거웠다. 다리가 저렸다. 근데 가슴은 가벼웠다.

'하늘이.'

이름만 떠올려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민준은 폰을 꺼내 하늘의 번호를 확인했다. 저장된 게 맞다. 실수로 지운 게 아니다.

'내일 뭐 하지?'

머릿속으로 데이트 코스를 짰다. 카페? 아니, 식사? 영화?

'아 몰라. 걍 만나면 되지.'

민준은 폰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이었다.

***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민준은 신음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윙.

폰이 울렸다. 민준은 눈도 안 뜨고 폰을 집었다.

"응..."

"형! 오늘 3건 잡혀있어~"

우진의 목소리였다.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어? 잠깐, 나 오늘 약속 있는데?"

"무슨 약속?"

"어제 만난 사람이랑..."

민준은 말을 멈췄다. 폰 화면을 봤다.

연락처 목록을 내렸다.

ㄱ, ㄴ, ㄷ... ㅇ.

없었다.

'이하늘.'

이름이 없었다.

민준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형? 왜 그래?"

"...아니, 잠깐만."

민준은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어젯밤 7시 이후로 아무것도 없었다.

문자함도 열었다. 역시 없었다.

"형, 설마 꿈 꾼 거 아니야?"

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형 3건 다 끝내고 집 갔잖아. 마지막은 독서광 수진 누나였고."

민준의 입이 바짝 말랐다.

"...아니, 그 다음에 한 명 더 만났어."

"네 번째?"

우진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형, 우리 규칙 있잖아. 하루 최대 3건."

"아니, 진짜야. 한강에서 산책했어. 이하늘이라고..."

"이하늘?"

우진이 되물었다.

"그런 사람 없는데? 형, 진짜 피곤한가 보다. 오늘 일정 보낼게~"

뚝.

전화가 끊겼다.

민준은 폰을 떨어뜨렸다.

***

거울 앞에 섰다.

민준은 자기 얼굴을 들여다봤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았다.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아니다. 아닐 리 없다.

민준은 손바닥을 봤다. 어젯밤 캔커피의 차가운 감촉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의 목소리도 생생했다.

'오늘 꼭 연락해요.'

그 눈빛도.

'이건 진짜였어.'

민준은 주먹을 쥐었다.

폰을 다시 집었다. 통화 목록을 몇 번이고 내렸다.

없었다.

검색창에 '이하늘'을 쳤다.

SNS, 메신저, 어디에도 없었다.

'뭐지.'

손끝이 저렸다.

***

민준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 카페로 달려갔다. 숨이 찼다.

카페 문을 열었다.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저기요."

민준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어젯밤에 여기 온 여자 기억나세요? 긴 생머리에 회색 니트..."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젯밤이요?"

"네. 7시쯤."

"저 어제 오후 근무 안 했는데요. 저녁 담당 직원한테 물어볼까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돌아왔다.

"어제 저녁에는 커플 손님 두 팀이랑 학생 한 명뿐이었대요."

"...네?"

"혹시 날짜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민준은 뒤로 물러났다.

***

한강변으로 뛰었다.

벤치에 앉았던 자리. 그 자리에 섰다.

아무것도 없었다.

캔커피 캔도, 흔적도 없었다.

민준은 주저앉았다.

'미친 건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때였다.

윙.

폰이 울렸다. 우진이었다.

"형, 첫 번째 약속 30분 후야. 홍대 입구역 2번 출구."

"...나 못 가."

"네? 왜?"

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진짜 못 하겠어. 이제 그만할래."

우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형."

"응."

"약속했잖아. 형이 그때 나 살려줬으니까 내가 형 인생 바꿔준다고."

"...그건 네가 원한 게 아니었어."

"형이 원하는 거야."

우진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형은 혼자 못 살잖아. 누가 옆에 있어줘야 돼. 내가 찾아줄게."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형, 30분."

뚝.

전화가 끊겼다.

***

민준은 지하철을 탔다.

홍대입구역에 내렸다. 2번 출구로 올라갔다.

여자가 서 있었다.

파란 원피스. 짧은 단발머리.

"민준 씨죠?"

"...네."

여자가 웃었다.

"저 예린이에요. 우진 오빠가 많이 얘기했어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안 떨어졌다.

예린이 민준의 팔을 잡았다.

"카페 갈까요?"

민준은 끌려갔다.

***

카페에 앉았다.

예린이 메뉴를 고르는 동안 민준은 창밖을 봤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웃고 떠들고 걸어갔다.

민준만 유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하늘아.'

속으로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총 7,063자 · 약 14분

- 1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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