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중독 프로젝트
주인공: 강민준
예린의 손가락이 내 손목을 감쌌다.
"오늘 심박수 평소보다 12% 낮네요."
뭐라고?
나는 웃음을 참았다. 아니, 참으려 했다.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진짜요?"
예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검지가 내 맥박 위를 천천히 쓸어 내렸다.
"심박 측정 어플이에요. 요즘 유행이잖아요."
'유행? 처음 듣는데.'
나는 손목을 빼려다 멈췄다. 예린의 눈빛이 이상했다. 웃고 있는데 눈은 안 웃고 있었다. 마네킹 같았다.
"근데 왜 그걸 재요?"
"궁금해서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등골이 서늘했다.
예린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체온이 차가웠다. 아니, 내 손이 식은 건가.
"민준 씨, 오늘 집중 안 되시죠?"
"...그런가요?"
"하늘 씨 생각하세요?"
숨이 턱 막혔다.
"누구요?"
"저번 주에 만난 분이요. 하늘 씨."
나는 컵을 들었다. 아메리카노가 이미 식어 있었다. 쓴맛이 혀끝을 감쌌다.
"기억 안 나는데요."
"거짓말."
예린이 웃었다. 이번엔 눈도 같이 웃었다. 그게 더 소름 돋았다.
"하늘 씨가 물었던 거 기억나요? '당신은 왜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지?'
예린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수첩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카페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민준 씨는 지난 3개월간 총 47명을 만났어요. 평균 소개팅 시간 1시간 23분. 두 번째 만남으로 이어진 경우 3건. 그중 하늘 씨만 4번 만났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저요? 그냥 데이터 좋아하는 사람이요."
예린이 수첩을 덮었다. 표지에 뭔가 적혀 있었다. K-47.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네. 천천히 다녀오세요."
복도로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벽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이게 뭐지.'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우진에게 전화를 걸려다 멈췄다.
'우진이라면 뭐라고 할까.'
"형, 예민해진 거 아냐? 요즘 너무 많이 만나서 그래."
그럴지도.
아니지.
예린은 내가 하늘을 만난 걸 알고 있었다. 하늘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누가 말해줬을까.'
수도꼭지를 틀었다.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물방울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예린은 없었다.
테이블 위에 쪽지만 남아 있었다.
"오늘 재밌었어요. 다음엔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해봐요."
뒷면에 작게 적혀 있었다.
"침대 밑 확인해보세요."
---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로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밑을 들여다봤다.
먼지가 코를 찔렀다. 재채기가 나왔다.
그때 뭔가 반짝였다.
USB였다.
'이게 왜 여기.'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았다. 끌어당겼다.
검은색 USB. 겉면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For K-47"
'K-47. 예린의 수첩에 있던 그거.'
노트북을 켰다. USB를 꽂았다.
암호 입력 창이 떴다.
"힌트: 당신이 나한테 처음 한 질문"
'처음 한 질문?'
나는 눈을 감았다. 하늘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한강 공원이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민준 씨는 왜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요?"
그게 첫 질문이었나.
아니었다.
그 전에 뭔가 더 있었다.
"커피 마실래요?"
이것도 아니었다.
'뭐였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초인종이 울렸다.
심장이 철렁했다.
현관 쪽을 봤다.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 밖에 서 있었다.
다시 울렸다. 길게.
"형, 나야."
우진이었다.
'지금?'
시계를 봤다. 밤 11시 47분.
"형, 집에 있는 거 알아. 불 켜져 있어."
나는 노트북 화면을 껐다. USB를 빼려다 말았다.
'아니지. 이상하게 보이면 더 수상해.'
그냥 뒀다.
문을 열었다.
우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손에 편의점 봉지를 들고 있었다.
"맥주 사왔어. 오늘 기분 이상해서."
"...들어와."
우진이 신발을 벗으며 집 안을 둘러봤다. 시선이 침실 쪽으로 향했다.
"형, 요즘 이상해."
"뭐가."
"말투. 표정. 다."
우진이 맥주캔을 건넸다. 나는 받지 않았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나 멀쩡한데."
"멀쩡한 사람이 3개월 동안 47명을 만나?"
숫자가 똑같았다.
'예린이 말한 거랑.'
우진이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캔을 땄다. 김이 새어 나왔다.
"형, 솔직히 말해. 하늘이 뭐 줬어?"
"...아무것도."
"거짓말."
우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형은 거짓말 못해.
우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형은 거짓말 못해. 눈동자가 떨려."
나는 캔을 받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엄청 중요하지."
우진이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편안한 자세였지만 시선은 날카로웠다.
"하늘이 형한테 뭐 줬는지 나한테 말 안 하면, 형 혼자 감당 못 해."
"누가 감당 못 한대."
"형이."
우진이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갔다.
"형은 3년 전부터 내 말 안 들은 적 없잖아. 왜 갑자기 이래?"
가슴이 답답했다. 숨이 얕아졌다.
'3년 전. 교통사고.'
우진이 구급차에 실려 갔던 날이 떠올랐다. 수술실 앞에서 밤을 샜다. 의사가 나왔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보호자분이세요?"
"...네."
"수술비 천만 원 선입금 부탁드립니다."
그날 통장을 다 털었다. 적금도 깼다. 우진이 눈을 떴을 때 처음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형, 미안해. 내가 갚을게."
하지만 갚지 않았다. 아니, 다른 방식으로 갚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야, 어디 가."
"화장실."
"거긴 화장실 아닌데."
"알아. 그냥 구경."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노트북이 침대 위에 있었다. USB도.
나는 우진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노트북을 닫으려 했다.
늦었다.
우진이 화면을 봤다. 암호 입력 창이 켜져 있었다.
"이게 뭐야."
"...그냥."
"그냥은 무슨."
우진이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힌트: 당신이 나한테 처음 한 질문."
우진이 중얼거렸다. 고개를 갸웃했다.
"형, 이거 하늘이 준 거지?"
"아니라니까."
"거짓말 그만해."
우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초조함. 아니, 공포에 가까웠다.
"형, 이거 열면 안 돼."
"왜."
"그냥. 안 돼."
우진이 USB를 뽑으려 했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놔."
"형."
"놔라고."
우진이 손을 뿌리쳤다. 힘이 세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손목이 얼얼했다.
"형은 몰라도 돼. 이건 내가 처리할게."
"무슨 소리야."
"그냥 모르는 척해. 제발."
우진의 눈이 흔들렸다. 목소리도.
'쟤가 왜 저래.'
우진이 뒤돌아 나가려 했다. USB를 손에 쥔 채로.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거 내 거야."
"아니야. 형 거 아니야."
"그럼 누구 건데."
우진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눈빛이 흔들렸다.
"...연구소."
"뭐?"
"이거 연구소 데이터야. 형이 가지고 있으면 안 돼."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연구소."
"그냥. 아무 데나."
"아무 데가 어디야."
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었다. USB가 땀에 젖어 미끄러졌다.
나는 우진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 USB가 바닥에 떨어졌다.
둘 다 동시에 몸을 숙였다.
우진이 먼저 집었다.
"형, 미안."
그가 현관으로 뛰었다. 신발도 안 신고.
나는 뒤쫓았다. 복도까지 나갔다. 우진이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야! 박우진!"
메아리만 돌아왔다.
---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노트북 화면이 아직 켜져 있었다.
암호 입력 창.
힌트: 당신이 나한테 처음 한 질문.
'하늘이 나한테 처음 뭐라고 물었지.'
소파에 앉았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한강 공원. 벤치. 하늘의 목소리.
"민준 씨는 왜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요?"
이게 첫 질문이었나. 아니었다. 그 전에 뭔가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 그다음.
"날씨 좋네요."
날씨 얘기. 그다음.
"여기 자주 와요?"
이것도 아니었다.
'뭐였지.'
눈을 감았다. 하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이게 진짜예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맞아. 그거였어.'
손가락이 키보드 위로 갔다.
이-게-진-짜-예-요-?
엔터를 눌렀다.
화면이 깜빡였다. 로딩 바가 돌았다.
폴더가 열렸다.
파일 세 개.
'피험자 K-47(강민준) 행동 기록.xlsx'
'실험 프로토콜 v2.3 최종.pdf'
'긴급 음성 메시지.mp3'
손이 떨렸다. 마우스 커서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첫 번째 파일을 눌렀다.
엑셀 시트가 펼쳐졌다. 날짜, 시간, 만난 사람 이름, 심박수, 동공 확장률, 도파민 수치.
스크롤을 내렸다. 47줄.
마지막 줄. 이하늘. 심박수 평소 대비 +34%. 도파민 수치 위험 구간 진입.
비고란에 빨간 글씨.
'피험자 감정 이탈 징후. 프로토콜 조정 필요.'
손에서 땀이 났다. 마우스가 미끄러졌다.
'나를 실험했다고?'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
PDF. 제목: 도파민 중독 연애 패턴 분석 프로젝트.
첫 페이지. 연구 책임자 정수아.
두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실험 대상자 선정 기준. 강민준(28세). 연애 경험 평균 3.2개월. 장기 관계 형성 실패 패턴 반복.
'날 왜.'
세 번째 페이지. 실험 설계.
"피험자에게 47명의 이성을 순차적으로 매칭. 각 만남마다 도파민 분비량 측정. 목표: 인위적 자극을 통한 감정 중독 유도 후, 진짜 감정과의 구별 능력 상실 여부 확인."
눈앞이 흐려졌다. 글자가 번졌다.
'47명 전부 다?'
손가락이 떨렸다. 페이지를 넘겼다.
협력자 명단.
박우진 — 일상 모니터링 및 심리 유도.
최예린 — 데이터 수집 및 2차 검증.
이하늘 — 최종 단계 감정 촉발 담당.
가슴이 무너졌다.
'우진이. 예린이. 하늘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나만 몰랐다.
마지막 파일을 눌렀다. 긴급 음성 메시지.
재생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손이 멈췄다.
'들어야 하나.'
핸드폰이 울렸다.
우진이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또 끊었다.
문자가 왔다.
"형 제발 그거 듣지 마. 형한테 안 좋은 내용이야."
손가락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떨리고 있었다.
"민준 씨, 이거 듣고 있다면... 제가 한 말은 다 거짓이 아니었어요."
숨소리가 거칠었다. 뭔가 급하게 녹음한 것 같았다.
"당신이 느낀 심장 소리, 손끝 떨림, 그거 다 진짜였어요. 제 것도 진짜였고."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없어요. 이 프로젝트는 당신만 실험한 게 아니에요. 저도, 우진이도, 예린이도 다..."
음성이 끊겼다. 잡음만 들렸다.
"안 돼, 제발..."
하늘의 비명.
그다음 침묵.
파일이 끝났다.
나는 멍하니 화면을 봤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늘이 어디 있지.'
핸드폰을 집었다. 하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끊었다. 다시 걸었다. 똑같았다.
우진에게 전화했다. 두 번째 신호에서 받았다.
"형."
"하늘이 어디 있어."
"...몰라."
"거짓말하지 마."
"진짜 몰라. 나도 찾고 있어."
우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짜 모르는 것 같았다.
"형, 그 파일 다 지워. 지금 당장."
"왜."
"그거 가지고 있으면 형도 위험해."
"누가 위험하게 해."
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숨소리만 들렸다.
"연구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형 주변 돌고 있어. 오늘 저녁부터."
심장이 철렁했다.
"무슨 소리야."
"형 아파트 CCTV 확인해봐. 검은 SUV 두 대. 한 시간째 주차돼 있어."
창문으로 달려갔다. 커튼을 젖혔다.
아래 주차장. 검은 차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시동은 꺼져 있었지만 안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
"형, 지금 나와. 내가 데리러 갈게."
"너도 그쪽 사람 아냐."
"아니야. 나는..."
우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형 지키려고 들어간 거야. 3년 전 그때..."
"그때 뭐."
"형이 내 수술비 낸 거. 그거 때문에 빚쟁이한테 쫓기고 있었잖아. 내가 그거 갚으려고 연구소 제안 받아들인 거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날 실험 대상으로 팔아넘긴 거야?"
"아니야! 나는 형 보호하려고..."
"보호는 무슨."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너 때문에 내가 47명이랑 만났어. 너 때문에 하늘이..."
말이 막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우진이 흐느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미안해. 형. 진짜 미안해."
전화를 끊었다.
노트북 화면을 다시 봤다. 폴더 안에 숨김 파일이 하나 더 있었다.
'최종 보고서_미공개.docx'
더블 클릭했다.
암호 창이 떴다.
"힌트: 당신이 진짜 찾고 싶은 건 뭔가요?"
손가락이 멈췄다.
'내가 찾고 싶은 건.'
하늘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만난 날. 한강 벤치.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민준 씨는 뭘 찾고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웃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하늘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하죠. 찾는 게 없으면 계속 헤매잖아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진-짜-를-찾-고-싶-어-요.
엔터를 눌렀다.
파일이 열렸다.
첫 줄.
"피험자 K-47 최종 평가: 실험 실패. 사유 — 이하늘과의 감정 교류 중 예상치 못한 변수 발생. 피험자가 진짜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함."
두 번째 줄.
"이하늘 역시 감정 이탈. 프로토콜 위반. 긴급 격리 조치 완료."
세 번째 줄.
"피험자 K-47 및 관련자 전원 기억 삭제 절차 예정일: 2024년 11월 15일."
오늘 날짜였다.
현관문이 열렸다.
열쇠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우진이 서 있었다. 손에 열쇠를 들고. 뒤에 낯선 남자 둘이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형, 그거 어디서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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