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약 14분 · 총 6,956자

골문 앞의 예언자

주인공: 강민준

새벽 5시, 손목에 감긴 테이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낡았다. 테이프 끝이 말려 올라가 있고, 접착력도 반쯤 죽어 있다.

강민준은 손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가볍다.

너무 가볍다.

'16살이구나.'

잔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운동장 한쪽 구석, 페인트가 벗겨진 골대가 서 있었다. 철제 프레임은 녹이 슬어 군데군데 붉게 변색됐고, 골망은 찢어진 곳을 노란 밧줄로 때운 흔적이 역력했다.

민준은 골대 앞에 섰다.

등 뒤로 붉은 해가 떠올랐다.

'돌아왔구나.'

28년의 기억이 16세의 몸에 들어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손바닥을 펴 보니 굳은살도 없고, 손가락도 길쭉하니 어렸다. 2038년 그날, 병원 침대에서 눈을 감았을 때의 투박한 손이 아니었다.

'어차피 꿈이겠지.'

하지만 꿈치곤 너무 생생했다. 잔디의 축축한 감촉, 아침 공기의 차가움, 골대 철제 프레임의 차가운 온도까지.

민준은 골대에 등을 기댔다.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은 3월 12일. 새 학기 첫 연습경기가 있는 날이다. 상대는 1학년 에이스 박준혁. 2022년 K리그 득점왕이 될 녀석.

'그놈의 슛을 수백 번 봤지.'

무회전 중거리 슛. 오른발 임팩트 순간 발목 각도 23도. 공이 공중에서 0.8초간 무회전으로 날아가다 갑자기 휘어지는 궤적.

프로무대에서도 골키퍼들이 제대로 못 막던 슛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민준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근력이 없다. 반응속도도 느리다. 점프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는 것과 막는 것은 다르다는 걸, 28년을 살며 뼈저리게 배웠다.

"어차피 안 되겠지."

중얼거림이 새벽 공기에 흩어졌다.

---

오후 3시, 운동장에 선수들이 모였다.

최태식 감독이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오늘 연습경기 한다. 1학년이랑 2, 3학년 섞어서."

민준은 벤치 끝에 앉아 있었다.

감독의 시선이 잠깐 스쳤다가 지나갔다.

"강민준, 너는 벤치."

"네."

대답은 짧았다.

옆에 앉은 2학년 후배가 슬쩍 쳐다봤다.

"형, 괜찮아요?"

"응."

그게 끝이었다.

민준은 말이 없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설명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주전은 정우성이지.'

3학년 주전 골키퍼. 185cm에 반응속도도 빠르고, 감독 신뢰도 두터운 녀석이었다.

민준은 그가 오늘 박준혁의 슛에 무릎 꿇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연습경기가 시작됐다.

박준혁이 공을 몰고 나왔다.

작은 체구, 민첩한 발놀림. 1학년답지 않게 자신감이 넘쳤다.

"형들, 각오해요!"

건방진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렸다.

3학년 수비수 김도윤이 피식 웃었다.

"이 새끼, 맛 좀 봐야겠네."

도윤이 압박을 들어갔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공을 오른쪽으로 밀어냈다. 스피드가 붙었다. 중앙선을 넘어 페널티 박스 바깥쪽까지 치고 들어왔다.

정우성이 골라인을 좁히며 앞으로 나왔다.

준혁의 오른발이 올라갔다.

민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임팩트 0.2초 전, 왼발 각도 23도.'

공이 날아갔다.

무회전이었다.

공중에서 공이 떨리지 않았다. 그냥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골대 2미터 앞에서 갑자기 왼쪽으로 휘었다.

정우성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공은 골망을 흔들었다.

"우오오!"

준혁이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형! 내 슛 못 막지?"

정우성이 잔디에 손을 짚고 일어나며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 이게 1학년 슛이냐."

감독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강민준! 들어가 봐!"

민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장갑을 끼며 골대 쪽으로 걸어갔다.

옆을 지나가는 정우성이 어깨를 툭 쳤다.

"막아 봐. 나도 못 막았어."

"응."

민준은 골대 앞에 섰다.

준혁이 공을 발밑에 두고 웃고 있었다.

"형도 똑같을 거예요."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시선을 준혁의 발에 고정했다.

'알고 있어. 네 슛 궤적, 임팩트 타이밍, 전부.'

하지만 아는 것과 막는 것은 다르다.

준혁이 달렸다.

왼발 디딤, 오른발 스윙. 각도 23도.

민준의 눈이 공을 쫓았다.

'오른쪽 상단. 0.8초 후 왼쪽으로 휜다.'

몸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반응이 늦었다. 0.3초. 그 찰나의 지연이 전부였다.

손끝이 공을 스쳤다.

0.3도 차이.

공은 골대 안쪽을 맞고 골망에 꽂혔다.

"으하하! 형도 못 막네!"

준혁이 웃으며 뛰어갔다.

민준은 잔디에 무릎을 꿇었다.

주먹을 쥐었다.

'알면서도 못 막았다.'

28년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골문 앞의 예언자 (2/3)

민준은 잔디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주먹을 쥔 채 그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형, 괜찮아요?"

누군가 다가왔다.

대답하지 않았다.

'0.3초.'

그게 전부였다. 공의 궤적을 완벽하게 읽었다. 왼발 각도, 임팩트 타이밍, 무회전 구간까지. 28년의 기억이 프레임 단위로 재생됐다.

하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했다.

근육이 뇌의 명령을 0.3초 늦게 받았다.

손끝이 공을 스쳤을 때, 이미 궤적은 틀어져 있었다.

'알았는데 못 막았다.'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박준혁이 멀리서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야, 봤지? 내 슛!"

"미쳤다, 진짜."

웃음소리가 운동장에 퍼졌다.

민준은 일어났다.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16살 손이구나.'

굳은살도 없고, 근육도 없고, 악력도 부족하다.

2038년의 손은 달랐다. 20년간 골대를 지킨 손은 투박하고 단단했다. 하지만 그 손도 결국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어차피 똑같아.'

민준은 골대를 지나쳐 벤치로 걸어갔다.

---

연습경기는 계속됐다.

정우성이 다시 골대에 들어갔다.

민준은 벤치 구석에 앉아 물병을 들이켰다.

옆에 2학년 후배 하민수가 앉았다.

"형, 아까 아쉬웠어요. 손 닿았잖아요."

"응."

"0.1초만 빨랐어도."

"그래."

민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민준의 눈빛이 차가웠다. 위로를 원하는 눈이 아니었다.

'0.1초가 아니라 0.3초야.'

민준은 손목을 돌렸다.

뻐근했다. 테이핑이 풀릴 듯 말 듯 헐거워졌다.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경기장에서 휘슬 소리가 울렸다.

박준혁이 또 골을 넣었다.

이번엔 정우성도 막지 못했다. 왼쪽 하단으로 깔끔하게 꺾어 넣은 슛이었다.

"씨발."

정우성이 골대를 발로 찼다.

감독이 손뼉을 쳤다.

"야, 정우성! 집중 안 하냐!"

"죄송합니다!"

정우성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민준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저 녀석, 곧 무릎 다친다.'

2010년 3월 말. 정우성은 연습경기 중 착지 실수로 무릎 인대를 다쳤다. 복귀까지 3개월. 그 사이 주전 자리는 다른 녀석에게 넘어갔다.

민준은 그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주전 골키퍼가 누구였지.'

기억이 흐릿했다. 28년 전 일이고, 당시 민준은 벤치에도 못 들었다.

'나였나?'

아니었다.

민준은 그해 여름 축구를 그만뒀다. 부상도 아니고, 실력 부족도 아니었다. 그냥 포기했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휘슬이 울렸다.

연습경기가 끝났다.

최종 스코어는 5:2. 박준혁이 4골을 넣었다.

선수들이 벤치로 돌아왔다.

감독이 호루라기를 목에 걸며 입을 열었다.

"박준혁, 잘했다. 나머지는 반성해."

"감사합니다!"

준혁이 환하게 웃었다.

감독의 시선이 정우성에게 고정됐다.

"너, 오늘 왜 그래. 컨디션 안 좋아?"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은 게 아니라 안 좋은 거지. 내일 체력 테스트 다시 한다."

"네."

정우성이 고개를 숙였다.

민준은 그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저 녀석, 무리하고 있구나.'

무릎이 이미 상한 상태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거였다. 주전 자리를 지키려고.

민준은 시선을 돌렸다.

'내 알 바 아니지.'

---

그날 밤, 민준은 체육관에 혼자 남았다.

불을 켜지 않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만으로 충분했다.

골대 앞에 공을 쌓아 놨다.

스무 개.

민준은 골대에서 11미터 떨어진 곳에 테이프를 붙였다.

페널티 킥 거리였다.

'박준혁의 슛 궤적.'

머릿속으로 다시 재생했다.

임팩트 순간 발목 각도 23도. 공이 떠오르는 순간 무회전. 0.8초 후 왼쪽으로 급격히 휘는 궤적.

민준은 골라인에 섰다.

눈을 감았다.

'0.3초를 줄여야 한다.'

몸이 반응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예측이 아니라 선제 반응.

눈을 떴다.

공을 하나 집어 페널티 지점에 놨다.

직접 찰 수는 없었다. 슈터가 없으니까.

민준은 공을 손으로 던졌다.

오른쪽 상단을 향해.

몸이 반응했다.

0.4초 후.

손이 허공을 갈랐다.

공은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젠장."

민준은 다시 공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왼쪽 하단.

던졌다.

몸이 움직였다.

0.3초.

손끝이 공을 스쳤다.

하지만 튕겨내지 못했다.

"또."

공을 집어 들었다.

오른쪽 상단.

던졌다.

다이빙.

0.35초.

실패.

"다시."

왼쪽 중단.

던졌다.

반응.

0.32초.

실패.

민준은 멈추지 않았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손목이 욱신거렸다.

테이핑이 풀렸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계속.'

# 골문 앞의 예언자 (3/3)

마흔 번째 공을 던졌을 때, 체육관 문이 열렸다.

"형?"

하민수였다.

민준은 공을 잡은 채 멈췄다.

"왜."

"불 안 켜고 뭐 해요?"

"연습."

민수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가로등 빛에 비친 민준의 손을 봤다.

"손…"

"괜찮아."

민준은 공을 다시 페널티 지점에 놨다.

민수가 다가왔다.

"형, 제가 차 줄까요?"

"됐어."

"혼자 던지는 거랑 실전이랑 다르잖아요."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수는 공을 집어 들었다.

"한 번만요. 제 슛 막아 보세요."

"너 슛 약하잖아."

"그래도 던지는 것보단 낫죠."

민수가 웃으며 공을 페널티 지점에 놨다.

민준은 골라인으로 돌아갔다.

무릎을 구부렸다.

민수가 공을 향해 달렸다.

왼발 디딤.

오른발 스윙.

'각도 18도. 오른쪽 하단.'

민준의 몸이 반응했다.

0.2초.

손이 먼저 움직였다.

공이 날아왔다.

손끝에 닿았다.

튕겨냈다.

공은 골대 바깥으로 굴러갔다.

민수가 눈을 크게 떴다.

"헐, 형 막았어요!"

민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손목이 떨렸다.

'민수 슛이라서 가능했다.'

박준혁의 슛과는 차원이 달랐다. 속도도 느리고, 궤적도 단순했다.

민수가 공을 주우러 갔다.

"한 번 더 차 볼게요!"

"됐어."

"왜요?"

"의미 없어."

민준은 장갑을 벗었다.

물집이 터져 있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

민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형, 미쳤어요.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집 간다."

민준은 공을 제자리에 두고 체육관을 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정우성이 훈련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태식 감독이 선수들을 모았다.

"정우성, 무릎 부상으로 병원 갔다. 당분간 못 뛴다."

웅성거림이 퍼졌다.

"얼마나요?"

"2주에서 한 달. 상태 봐서."

감독의 시선이 민준에게 고정됐다.

"강민준, 오늘부터 네가 주전이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민수가 어깨를 쳤다.

"형, 기회잖아요!"

"그래."

민준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2010년 3월 27일.'

정우성이 다친 날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지 않았다.

'막을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어차피 말해도 안 믿었을 거다. 미래를 안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받았을 거고, 조심하라고 해도 무시했을 거다.

민준은 훈련복을 입으며 손목을 돌렸다.

테이핑이 두껍게 감겨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지.'

---

오후 4시, 연습경기가 시작됐다.

민준은 골대 앞에 섰다.

박준혁이 공을 몰고 나왔다.

"형, 오늘도 못 막을걸요?"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혁이 웃으며 중앙선을 넘었다.

수비수 김도윤이 압박을 들어갔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공을 오른쪽으로 밀어냈다.

속도가 붙었다.

페널티 박스 바깥쪽까지 치고 들어왔다.

민준의 눈이 준혁의 발에 고정됐다.

'왼발 디딤, 오른발 각도 23도.'

준혁의 발이 올라갔다.

임팩트.

민준이 움직였다.

0.2초 전.

몸이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공이 왼쪽으로 휘었다.

손끝이 닿았다.

하지만 각도가 모자랐다.

0.3도.

공은 골대 안쪽을 맞고 굴러 들어갔다.

"으하하! 역시 못 막네!"

준혁이 환호했다.

민준은 잔디에 엎드렸다.

주먹을 쥐었다.

'또.'

알았는데 막지 못했다.

0.1초 먼저 움직였는데도.

'16살 몸으로는 부족하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테이핑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민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하늘을 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어차피 이럴 줄 알았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식.

"뭐야, 형 웃어요?"

준혁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골대로 걸어가 네트를 잡았다.

'알면 뭐해. 막지 못하는데.'

28년을 살았다.

미래를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선수 생활도, 무너진 인생도, 후회로 가득한 밤들도.

'결국 똑같잖아.'

손목에서 피가 장갑 안으로 스며들었다.

뜨거웠다.

민준은 장갑을 벗었다.

테이핑이 풀어져 있었다.

감독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강민준! 괜찮아?"

"네."

민준은 장갑을 다시 꼈다.

골라인에 섰다.

준혁이 또 공을 몰고 나왔다.

"형, 이번엔 왼쪽으로 갈게요!"

민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짓말.'

준혁의 발목 각도가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임팩트.

민준이 움직였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0.15초 전.

공이 날아왔다.

손이 닿았다.

튕겨냈다.

공은 골대 바깥으로 굴러갔다.

"헐!"

준혁이 멈춰 섰다.

"형, 어떻게 알았어요?"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을 돌렸다.

뻐근했다.

'이번엔 막았다.'

총 6,956자 · 약 14분

- 1 화 끝 -

AI 생성 콘텐츠 · 작가 케뤼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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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회귀#성장#축구
케뤼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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