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는 과거를 읽는다
주인공: 한로로
검이 목을 향해 날아왔다.
"죽어."
세리온의 목소리는 감정 하나 없이 차가웠다.
'아, 진짜 죽는구나.'
로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검날이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재밌겠네~"
누군가 로로의 허리를 낚아챘다.
세상이 뒤집혔다. 아니, 빛이 터졌다.
"으윽!"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더니 몸이 공중에 뜬 것처럼 붕 떠올랐다. 귀가 먹먹해지고, 속이 뒤집히고,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이게 뭐야, 뭐야, 뭐야—'
그리고 쿵.
등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혔다.
"으윽... 토할 것 같아..."
로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손바닥에 차갑고 거친 돌바닥 감촉이 느껴졌다.
"첫 순간이동치곤 잘 버텼네? 보통은 토하던데."
리엔이었다.
그는 로로의 옆에 서서 손톱을 후후 불며 웃고 있었다. 마치 재밌는 장난을 친 아이처럼.
"순간이동... 이게요?"
"응. 마법이야, 마법."
리엔은 손가락을 튕겼다. 파란 불꽃이 허공에 튀었다가 사라졌다.
"왜... 왜 저를 구했어요?"
로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죽으면 재미없잖아~"
"...네?"
"파괴자가 그냥 죽으면 이야기가 거기서 끝이잖아. 그럼 심심하지."
'이 사람 진짜 미쳤나.'
로로는 뒷걸음질 쳤다. 등 뒤로 무너진 벽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폐허였다.
무너진 기둥, 깨진 창문, 덩굴이 뒤덮은 돌벽. 지붕은 반쯤 무너져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긴... 어디예요?"
"왕도 외곽. 옛날엔 귀족 저택이었대. 지금은 아무도 안 와."
리엔은 벽에 기대 서서 로로를 바라봤다.
"겁먹었어? 얼굴이 새하얗네."
"당연하죠! 방금 죽을 뻔했는데!"
로로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리엔은 피식 웃었다.
"그럼 도망가든가. 아니면 날 따라오든가."
"따라가라니... 어딜요?"
"재밌는 거 보여줄게."
리엔은 몸을 돌려 폐허 안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도망가야 하나.'
로로는 뒤를 돌아봤다. 폐허 밖은 어둠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세리온이 쫓아올지도 모른다.
'아, 근데 그러고 보니...'
로로는 문득 깨달았다.
'나 지금 방향도 모르잖아.'
왕도 외곽이라고 했지만, 동서남북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밤하늘의 별도 낯설었다.
"안 와?"
리엔이 돌아보며 물었다.
로로는 한숨을 쉬었다.
"...가요."
# 2
리엔은 폐허 안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였다.
"어두워요."
"그럼 이거."
리엔이 손을 흔들자 푸른 불빛이 허공에 떠올랐다. 마법 불빛이었다.
계단은 생각보다 깊었다. 한참을 내려가니 좁은 복도가 나타났고, 복도 끝에 철문이 있었다.
리엔은 철문을 툭툭 두드렸다.
"엘리스~ 나야."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늦었어."
낮고 차분한 여자 목소리였다.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검은 로브를 입은 여자였다. 은색 안경을 쓰고 있었고, 머리는 깔끔하게 묶여 있었다.
"예언 기록관, 엘리스."
리엔이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파괴자, 한로로."
엘리스는 로로를 쳐다봤다. 표정이 없었다.
"...예언서에 나온 그대로네."
"예언서요?"
로로는 되물었다.
엘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들어와. 시간이 없어."
# 3
철문 안은 작은 방이었다.
벽면은 온통 책장이었고,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가운데 낡은 나무 책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 두꺼운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엘리스는 책상 앞에 섰다.
"앉아."
로로는 의자에 앉았다. 리엔은 벽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엘리스는 책을 넘겼다.
"예언서 2권. 네가 보관소에 온 것까지 기록되어 있어."
"...네?"
로로는 책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글씨체는 낡았지만 또렷했다.
그리고 그 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파괴자는 폐허의 지하로 내려간다. 리엔과 함께.'**
로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건... 방금 일이잖아요."
"맞아. 예언서는 미래를 기록해."
엘리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로로는 책장을 넘겼다. 손이 떨렸다.
다음 페이지에도, 그다음 페이지에도 문장들이 이어졌다.
'파괴자는 의자에 앉는다.'
'파괴자는 책을 넘긴다.'
'파괴자는 떨린다.'
"이게... 대체..."
로로는 책을 덮었다. 숨이 막혔다.
"예언서는 300년 전부터 존재했어."
엘리스가 말했다.
"대붕괴 이후, 현자가 남긴 유산. 지금까지 모든 예언이 들어맞았어."
"하지만 이건..."
로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 전개부
"이건 미래가 아니에요."
로로의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엘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제 말은요."
로로는 책을 다시 펼쳤다.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었다.
"이 문장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노트에 쓴 거예요."
리엔이 벽에서 몸을 떼며 다가왔다.
"노트?"
"맞아요. 그때 판타지 소설 쓰는 게 취미였거든요. 주인공이 예언서를 발견하는 장면이었어요. 근데..."
로로는 숨을 들이켰다.
"주인공 이름이 '카엘'이었지, 제 이름이 아니었어요."
엘리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네 말은..."
"누가 제 상상을 훔쳐간 거예요. 아니면..."
로로는 책장을 넘겼다. 페이지마다 익숙한 문장들이 흘러갔다.
'예언서는 과거를 읽는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건 예언이 아니라 기록이에요. 제가 이미 상상한 걸 베껴 쓴 거예요."
"헐."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예언서가 표절한 거네?"
"웃길 일이 아니에요!"
로로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엘리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엘리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예언서는 처음부터 거짓이었어."
방 안이 조용해졌다.
로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3권은 어디 있어요?"
엘리스가 로로를 쳐다봤다.
"왜?"
"확인하고 싶어요. 제가 쓴 이야기가 더 있는지."
엘리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
복도 끝에 또 다른 철문이 있었다.
문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빛나는 선들이 얽혀 있었고, 가운데 붉은 인장이 박혀 있었다.
"3권의 인장."
엘리스가 말했다.
"'파괴자의 혈흔'이 있어야 열려."
로로는 인장을 들여다봤다. 문양 가운데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혈흔이요?"
"피."
엘리스가 짧게 답했다.
로로는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이빨로 살짝 깨물자 따끔한 통증이 왔다.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맺혔다.
'진짜 하는 거야?'
로로는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이 인장에 닿았다.
피 한 방울이 홈 위로 떨어졌다.
찌직—
인장이 빛났다.
문양의 선들이 번쩍이며 움직였다. 붉은 빛이 퍼지더니 인장이 스르륵 풀렸다.
철문이 열렸다.
안쪽은 어두웠다. 축축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엘리스가 먼저 들어갔다. 리엔이 그 뒤를 따랐고, 로로는 마지막이었다.
방 안은 좁았다. 벽면에 횃불이 하나 걸려 있었고, 가운데 석판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두꺼운 가죽 표지. 먼지가 수북했다.
예언서 3권.
엘리스가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는 비어 있었다. 두 번째 페이지도, 세 번째도.
로로는 숨을 참았다.
그리고 열 번째 페이지.
글자가 나타났다.
'최종 결전.'
로로의 심장이 멎었다.
"이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노트 마지막 장에 썼던 이야기.
주인공 카엘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장면.
로로는 손을 뻗어 페이지를 넘겼다.
문장들이 흘러갔다.
'카엘은 검을 든다.'
'카엘은 선택한다.'
'카엘은 세계를 멸망시킨다.'
"잠깐."
로로는 멈췄다.
"이거... 아닌데."
"뭐가?"
리엔이 물었다.
"제가 쓴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어요. 카엘이 세계를 구하고 끝나는 거였어요. 근데 이건..."
로로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엔 한 줄만 적혀 있었다.
'파괴자는 7일 후, 왕도에서 죽는다.'
방 안이 얼어붙었다.
리엔이 휘파람을 불었다.
"와, 배드엔딩?"
"아니에요."
로로는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제가 쓴 게 아니에요. 누가... 누가 결말을 바꿨어요."
엘리스가 책을 덮으려 했다.
그 순간 책이 저절로 펼쳐졌다.
페이지가 바람도 없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멈추지 않고.
"뭐야, 이거."
리엔이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 페이지에 멈췄다.
거기엔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붉은 글씨로.
'파괴자여, 4권을 찾아라. 북쪽 국경의 추방자가 알고 있다.'
로로는 책을 내려다봤다.
'누가 이걸 쓴 거야?'
그때였다.
쾅—!
위쪽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천장이 흔들렸다.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세리온이야."
엘리스가 책을 집어 들었다.
"여길 찾아낸 거야."
"벌써?"
리엔이 혀를 찼다.
"생각보다 빠른데?"
쾅! 쾅!
폭발음이 연달아 터졌다.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로로! 나와!"
세리온의 목소리였다.
로로는 뒷걸음질 쳤다. 등이 벽에 부딪혔다.
"어떡해..."
엘리스가 로로에게 다가왔다.
"들어."
그녀가 속삭였다.
# 결말부 (Part 3/3)
"4권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어."
엘리스의 속삭임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북쪽 국경의 추방자. 하지만 그는 예언서를 증오하지."
"그게 무슨..."
쾅—!
철문이 폭발했다.
불꽃이 복도를 삼켰다. 연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로로는 기침을 했다. 눈이 따가웠다.
연기 너머로 갑옷 소리가 들렸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여러 명이었다.
"한로로."
세리온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로로는 뒤를 돌아봤다. 방은 막다른 길이었다. 출구는 세리온이 막고 있는 철문뿐.
'어떡해.'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리엔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싸울 거야?"
"안 돼."
엘리스가 리엔의 팔을 잡았다.
"세리온의 기사단은 12명. 우린 셋이야."
"그럼 어쩌라고?"
리엔이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
세리온이 연기를 뚫고 나타났다.
갑옷은 빛났다. 검은 긴 망토가 어깨에 걸쳐 있었고, 오른손엔 창이 들려 있었다.
뒤에 기사들이 줄지어 섰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 표정이 없었다.
"예언서 3권을 내놓아라."
세리온이 말했다.
"그럼 목숨은 살려주지."
엘리스가 책을 뒤로 감췄다.
"이건 왕궁 기록관 소유야. 네가 가져갈 권리는 없어."
"권리?"
세리온이 창을 들어 올렸다.
창끝이 엘리스를 향했다.
"예언서는 왕가의 것이다. 네가 훔쳐간 거지."
"거짓말."
엘리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이 허락했어. 내가 보관하라고."
"옛 왕의 명령은 끝났어."
세리온이 한 걸음 다가왔다.
"새 왕이 즉위했으니까."
로로는 그제야 깨달았다.
'왕이 바뀐 거야.'
그리고 세리온은 새 왕의 편.
엘리스는 옛 왕의 사람.
"마지막으로 묻는다."
세리온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내놓을 거냐, 말 거냐."
엘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리온이 창을 휘둘렀다.
번쩍—
창끝이 엘리스의 어깨를 스쳤다. 로브가 찢어졌다.
"엘리스!"
로로는 비명을 질렀다.
엘리스가 비틀거렸다. 피가 흘렀다.
리엔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단검을 휘둘렀지만 세리온의 창에 튕겨났다.
"쯧."
리엔이 뒤로 물러섰다. 손목을 털었다.
"역시 강하네."
세리온이 창을 다시 겨눴다. 이번엔 로로를 향해.
"네가 파괴자냐."
로로는 숨이 막혔다.
창끝이 눈앞에 있었다. 차가운 쇠. 날카로운 끝.
'죽는 거야?'
다리가 풀렸다.
"7일 후면 죽는다고 했지."
세리온이 말했다.
"그럼 지금 죽여도 예언은 틀리지 않아."
창이 앞으로 찔러왔다.
로로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책이 빛났다.
예언서 3권.
엘리스가 떨어뜨린 책. 바닥에 펼쳐진 책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세리온의 창이 멈췄다.
빛이 창끝을 감쌌다. 창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뭐야, 이건."
세리온이 창을 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로로는 눈을 떴다.
책에서 글자가 떠올랐다. 허공에 붉은 글씨로.
'파괴자는 선택한다.'
'도망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선택하라고?"
로로는 중얼거렸다.
'내가 뭘 선택해.'
그때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렸다.
—넌 이미 알고 있어.
낯선 목소리였다. 여자 목소리. 나이 든 사람 같았다.
—네가 쓴 이야기를 기억해.
'내가 쓴 이야기?'
로로는 눈을 감았다.
중학교 3학년. 노트 마지막 장.
'최종 결전.'
주인공 카엘이 예언서를 불태우는 장면.
'예언서를 파괴하면 운명이 바뀐다.'
그 설정이었다.
로로는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예전에 상상했던 건데."
로로는 책을 집어 들었다.
빛이 손 안에서 맥박처럼 뛰었다.
"예언서를 불태우면 예언이 사라져요."
엘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제 소설 설정이었어요. 예언서는 불에 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파괴자의 손에서만 탄다고."
세리온이 창을 놓았다.
"설마 네가..."
로로는 책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었다.
'불을 내야 해.'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마법도 못 쓴다.
'어떻게...'
리엔이 다가왔다.
"이거 써."
그가 횃불을 건넸다.
로로는 횃불을 받아들었다. 불꽃이 흔들렸다.
"진짜 태울 거야?"
리엔이 물었다.
로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횃불을 책 위로 내렸다.
불꽃이 책에 닿았다.
치직—
책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 연기가 피어올랐다. 냄새가 이상했다. 탄 종이가 아니라 쇠 타는 냄새.
세리온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가 달려들었지만 늦었다.
책은 이미 재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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