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주인공: 한지수
건우가 나간 뒤에도 그의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지수는 책상 모서리를 짚고 섰다. 손끝에 차가운 나무 질감이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니, 뛰고 있었다는 게 정확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대표님."
도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지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전무님도 가보세요."
"앞으로 그 사람과 단둘이 만나지 마십시오."
숨이 멎었다.
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양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표정은 평소처럼 무심했지만, 눈빛이 달랐다.
'명령이 아니야.'
부탁처럼 들렸다.
"…왜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선이 무거웠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지수가 한 걸음 다가갔다.
"왜 그러시는데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위험합니다."
"뭐가요?"
"그 사람이."
도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지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 턱선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입술은 얇게 다물어져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어.'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이었다. 절박함 같은 것.
"전무님."
지수가 이름을 불렀을 때,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전무님이…"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기억이 밀려왔다. 회귀 전, 그날 밤. 건우의 손이 목을 조였을 때. 숨이 막혔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였지.'
목소리가 들렸었다. 분명히. 하지만 희미했다. 산소가 부족해서 의식이 흐려지던 순간이었으니까.
'도현이었나.'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도현의 표정을 보니, 뭔가 있는 것 같았다.
"혹시 그때…"
"제발 조심하십시오."
도현이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지수는 입을 다물었다. 도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지수는 혼자 남았다.
손이 떨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말을 안 해주는 거야.'
답답했다. 도현은 항상 그랬다. 필요한 말만 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그랬다. 지수가 무시했을 때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내가 투명인간 취급했잖아.'
가슴이 조여왔다. 지수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도현이 쓰던 것. 회귀 후, 그의 책상에서 가져온 거였다.
펜을 집어 들었다. 무게감이 손에 전해졌다. 지수는 메모지를 꺼냈다. 펜촉을 종이에 댔다.
*'도현씨.'*
글씨가 번졌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수는 펜을 내려놓았다.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보낼 수도 없는 편지.
'나약해.'
스스로 생각했다. 감정에 휘둘리는 건 약한 거라고 배웠다. 회사를 이끌려면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통제해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은 통제가 안 됐다.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였다.
**[커피 한잔 어떠세요. — 건우]**
지수는 화면을 뚫어져라 봤다. 건우. 저번 생에서 자신을 죽인 남자. 이번 생에서도 뭔가 꾸미고 있는 남자.
'피해야 하나.'
도현의 말이 떠올랐다. 단둘이 만나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지수는 답장을 쳤다.
[좋아요. 시간 보내주세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손끝이 차가웠다. 심장은 여전히 빨랐다.
'정면으로 맞서야 해.'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회귀 전처럼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번엔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라인드를 올렸다. 복도가 보였다.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평범한 오후였다.
지수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를 걷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도현이 서 있었다. 회의실 앞. 팔짱을 낀 채.
"어디 가십니까."
목소리가 낮았다.
지수는 걸음을 멈췄다.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지수의 손에 든 가방으로 향했다. 외출 준비를 한 게 티가 났다.
"약속이 있어서요."
"누구랑요."
"…그건 사적인 일인데요."
도현이 한 걸음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졌다. 지수는 자리를 지켰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혹시 강건우 씬가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지수는 표정을 굳혔다. 도현은 지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이.
"가지 마십시오."
"왜요."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전무님이 막을 권한은 없어요."
목소리가 차갑게 나왔다. 지수는 도현을 지나쳐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왔다.
"대표님."
# Part 2: 전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지수의 손가락이 멈췄다.
도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놓으세요."
"안 됩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턱 근육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런 도현은 처음이었다.
'왜 이래.'
손목에 전해지는 체온이 뜨거웠다. 아니, 자신의 피부가 차가운 건지도 몰랐다. 지수는 손을 빼려 했지만 도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아파요."
거짓말이었다. 아프지 않았다. 그저 놓고 싶었다. 이 온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현이 손을 풀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을 막은 채 서 있었다.
"비켜주세요."
"같이 가겠습니다."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유를 설명하려면 회귀를 말해야 했다. 저번 생에서 건우가 자신을 죽였다고. 이번엔 달라야 한다고.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어.'
도현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거리가 한 뼘도 안 남았다. 지수는 뒤로 물러섰지만 벽에 등이 닿았다.
"대표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숨소리가 들렸다. 아니, 자신의 숨소리인지도 몰랐다. 심장이 귀까지 뛰는 것 같았다.
"제발."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수는 그 안에서 뭔가를 봤다. 두려움. 절박함. 그리고 다른 감정.
'이건 뭐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감정을 마주하면 무너질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가방 안에서 울려 퍼졌다.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벨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지수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이름이 떴다.
박건우.
"받지 마십시오."
도현의 목소리였다. 지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수 씨, 카페 앞인데 안 보이시네요?
건우의 목소리가 밝았다. 친근했다. 저번 생에서 자신을 죽인 그 남자의 목소리.
"지금 가고 있어요."
—서두르지 마세요. 전 시간 많으니까.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손에 땀이 났다.
"곧 도착할게요."
통화를 끊었다.
도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가지 마십시오."
"못 가게 할 권한 없으세요."
차갑게 말했다. 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수는 그를 밀어냈다. 손바닥에 그의 가슴이 닿았다.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도현이 서 있었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지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안 막아.'
문이 반쯤 닫혔다. 도현의 얼굴이 가려졌다. 하지만 눈빛만은 보였다.
절망.
문이 완전히 닫혔다.
지수는 혼자 남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벽에 등을 기댔다.
손이 떨렸다.
'미안해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도현에게인지, 자신에게인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로비가 보였다. 사람들이 오갔다. 평범한 오후였다.
지수는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가 시렸다.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 가세요?"
기사가 물었다.
지수는 주소를 말했다. 건우가 보낸 카페 위치. 목소리가 떨렸다.
차가 출발했다.
창밖을 봤다. 회사 건물이 멀어졌다. 고층 유리창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어딘가에서 도현이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갈까.'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달라야 해.'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함을 열었다. 건우의 문자가 떠 있었다. 지수는 스크롤을 내렸다. 예전 대화들이 보였다.
저번 생의 기억이 겹쳐졌다.
건우는 항상 친절했다. 웃음이 많았다. 지수가 힘들 때 커피를 사다 줬다. 회사 일로 스트레스받을 때 술자리를 제안했다.
'그때도 이랬지.'
신뢰를 쌓았다. 천천히, 조금씩.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모든 걸 무너뜨렸다.
차가 멈췄다.
"다 왔습니다."
지수는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카페가 보였다. 작고 아늑한 곳. 통유리 너머로 건우가 앉아 있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지수는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종소리가 울렸다.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이쪽이에요."
건우가 일어서며 웃었다. 지수는 그에게로 걸어갔다. 다리가 무거웠다.
자리에 앉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전 방금 왔어요."
거짓말이었다.
# Part 3: 위기-클리프행어
건우 앞에 앉은 지수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커피 주문할까요?"
건우가 메뉴판을 밀었다. 웃는 얼굴. 저번 생에서 봤던 그 표정.
"아메리카노요."
"역시 심플하시네요."
건우가 직원을 불렀다. 주문을 했다. 지수는 그의 손을 봤다. 깨끗한 손톱. 시계는 고급 브랜드. 저번 생에서 자신의 목을 조른 그 손.
'진짜 기억이 맞나.'
가끔 헷갈렸다. 회귀가 꿈인지, 지금이 꿈인지.
"요즘 회사 일은 어때요?"
건우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그냥요. 바쁘죠."
"힘드시겠어요. 대표 자리가 쉽진 않잖아요."
공감하는 척. 저번에도 그랬다. 지수가 지칠 때마다 나타나서 위로했다. 그리고 조금씩 회사 정보를 캐냈다.
"건우 씨도 바쁘시잖아요."
"저야 뭐. 요즘은 새 프로젝트 준비 중이에요."
커피가 나왔다.
지수는 잔을 들었다. 뜨거웠다. 입술에 댔다가 내렸다. 건우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
"그 프로젝트, 혹시 저희 회사랑 관련 있나요?"
던졌다.
건우의 손이 미세하게 멈췄다. 잔을 내려놓는 동작이 0.5초 느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감이요."
"지수 씨 감은 항상 정확하시죠."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걸렸어.'
지수는 잔을 내려놓았다. 심장이 빨라졌지만 표정은 유지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뭘 원하세요."
"직설적이시네요."
"시간 아까우니까요."
건우가 등받이에 기댔다. 팔짱을 꼈다. 표정이 변했다. 친근함이 사라졌다.
"좋아요. 그럼 저도 솔직하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수 씨 회사 지분, 일부 넘겨주시면 어때요?"
숨이 멎었다.
저번 생과 똑같았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회사를 노렸다. 지수를 이용해서 내부 정보를 빼내고, 주주들을 포섭하고, 마지막엔 지수를 제거했다.
"거절하면요?"
"그럼 곤란한데요."
건우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지수에게 돌렸다. 사진이 떠 있었다.
계약서.
지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처음 보는 거였다.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는 내용.
"이건 위조예요."
"증명할 수 있어요?"
손이 떨렸다. 지수는 휴대폰을 밀어냈다.
"협박이네요."
"협박이라니요. 제안이죠."
건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거리가 좁혀졌다. 커피 향보다 그의 향수 냄새가 진했다.
"지분 30%만 넘기세요. 그럼 이 서류는 없던 일로."
"안 하면요?"
"언론에 풀리겠죠. 대표님 평판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이번에도 똑같네.'
저번 생에서도 건우는 이랬다. 서류를 조작하고, 협박하고, 결국 지수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휴대폰이 울렸다.
건우의 휴대폰. 그가 화면을 확인했다. 미간이 좁혀졌다.
"잠깐 받아야겠네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밖으로 나갔다. 유리 너머로 통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도망쳐야 했다. 지금 당장.
'아니야.'
멈췄다.
'도망치면 또 진다.'
저번 생에서 그랬다. 건우의 협박에 무너졌다. 지분을 넘겼다. 그리고 결국 죽었다.
'이번엔 달라.'
지수는 건우의 휴대폰을 봤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
'지금이야.'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손가락이 멈칫했다.
'생일? 아니야. 회사 설립일?'
숫자를 눌렀다. 틀렸다. 다시 시도했다.
0924.
열렸다.
'어떻게 알았지?'
순간 기억이 스쳤다. 저번 생에서 건우가 말했다. '제 여동생 생일이에요.'라고.
갤러리를 열었다. 사진들이 쭉 떠올랐다. 스크롤을 내렸다. 회사 서류, 계약서, 그리고...
도현 사진.
심장이 멈췄다.
도현이 누군가와 만나는 사진. 장소는 어두운 골목. 상대방 얼굴은 안 보였다. 하지만 도현의 표정이 심각했다.
'왜 도현 사진이...'
다음 사진을 넘겼다. 또 도현. 이번엔 회사 앞.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
'건우가 도현을 미행했어.'
손이 얼어붙었다.
문이 열렸다.
종소리. 건우가 돌아오고 있었다. 지수는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놓았다. 손이 떨렸다.
"미안해요. 급한 전화라."
건우가 앉았다. 지수를 봤다. 뭔가 눈치챈 것 같았다.
"얼굴이 안 좋으신데요?"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아까 얘기 계속할까요."
건우가 몸을 기울였다.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지분 넘기실 거예요, 말 거예요?"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현 사진이 자꾸 떠올랐다.
'왜 도현을 미행해?'
'도현이 위험하다고 한 이유가 이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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