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동맹
주인공: 한지수
건우가 나간 지 오 분.
대표실 문이 다시 열렸다.
"잠깐 괜찮습니까."
도현이었다.
지수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조여들었다. 회귀 전엔 몰랐던 감각이었다.
'왜 이렇게 힘들지.'
"들어오세요."
목소리는 평소처럼 나왔다. 다행이었다.
도현이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책상 앞에 멈췄다.
"건우 씨, 거절하셨습니까."
"네."
"잘하셨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긴장이 섞여 있었다.
지수는 천천히 돌아앉았다. 도현이 서 있었다. 정장 재킷 단추를 잠근 채, 손은 주머니에 넣고. 언제나처럼 완벽한 자세였지만 눈빛만은 달랐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현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턴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슨 뜻이죠."
"건우 씨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대표님을 설득할 다른 방법을 찾겠죠. 아니면…"
말끝이 흐려졌다.
지수는 알고 있었다. 도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니면 제거하려 들겠죠.'
회귀 전 타임라인에서 건우가 자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도현이 그걸 안다는 사실을.
"그래서요?"
지수가 물었다.
도현이 한 걸음 다가섰다.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제안?"
"회사에선 냉랭하게 지내십시오. 저와 대표님이 사이가 나쁜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지수의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눌렀다.
"왜죠."
"건우 씨가 대표님을 고립시키려 할 겁니다.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떼어내려고 하겠죠. 그럴 때 제가 대표님 편이라는 게 드러나면…"
"저도 위험해지고 당신도 위험해진다?"
"예."
도현의 대답은 단호했다.
지수는 그를 올려다봤다. 형광등 불빛 아래 도현의 얼굴은 그림자가 질 만큼 가까웠다.
'이 사람은 대체 뭘 생각하는 거지.'
"대신 퇴근 후엔 함께 움직이죠."
도현이 말을 이었다.
"건우 씨의 증거를 모으는 겁니다. 둘이서."
"…증거요?"
"제가 이미 확보한 게 있습니다. USB에 담아뒀습니다. 오늘 저녁, 제 차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지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함께 움직인다고?'
회사에선 남이고 퇴근 후엔 동맹자라는 건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거절하면요?"
지수가 물었다.
도현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봤다.
"…그럼 제가 혼자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대표님, 전 당신이 안전하길 바랍니다."
지수의 입술이 말랐다.
'안전하길 바란다고?'
회귀 전 타임라인에서 자신이 죽은 후, 도현이 3년을 더 살았다는 걸 지수는 알고 있었다. 건우를 쫓으며 복수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그런데 왜.'
왜 지금 이렇게 차분한 얼굴로 서 있는 건가.
"…알겠어요."
지수가 답했다.
"하죠. 냉랭한 연기."
도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풀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 아니에요. 어차피 제 목숨 걸린 일이니까."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과의 거리가 한 뼘도 안 됐다.
"그런데 전무님."
"예."
"당신 진심은 뭐예요."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랑 함께 움직이는 게 정말 건우를 막기 위해서만인가요. 아니면…"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도현이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 저녁 여섯시, 지하 주차장에서 뵙겠습니다."
그는 돌아섰다.
"아, 그리고."
문 앞에서 도현이 멈췄다.
"내일부턴 회사에서 저한테 말 놓으셔도 됩니다. 더 냉랭해 보일 테니까."
문이 닫혔다.
지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뭐야, 이 사람.'
***
오후 여섯시.
지하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지수는 도현의 차를 찾았다. 검은색 세단이 구석에 서 있었다.
다가가자 조수석 문이 열렸다.
"타십시오."
도현이었다.
지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 올랐다. 문을 닫자 좁은 공간 안에 도현의 체온이 느껴졌다.
'너무 가까워.'
"USB 여기 있습니다."
도현이 노트북을 켰다. 화면이 밝아지며 파일 목록이 떴다.
"이게 뭔가요."
"건우 씨의 과거 행적입니다. 사기 전과, 위조 문서, 그리고…"
도현이 한 폴더를 열었다.
사진들이 쏟아졌다.
지수의 숨이 멎었다.
"이건…"
사진 속엔 도현이 있었다.
회사 앞에서 걷는 도현. 카페에 앉아 있는 도현. 차에서 내리는 도현.
모두 몰래 찍힌 사진들이었다.
"건우 씨가 절 미행했습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최소 두 달은 됐을 겁니다."
지수의 손이 노트북 화면을 향했다. 손가락 끝이 차가운 액정에 닿았다.
"왜 이런 걸…"
"저를 제거하려는 겁니다."
도현이 말했다.
지수의 입술이 말랐다.
사진 속 도현은 자신이 찍히는 줄 몰랐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뒷모습, 엘리베이터에서 휴대폰을 보는 옆모습, 심지어 집 앞 주차장에서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이 정도면…'
"제거하려는 거라고요?"
지수가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 씨는 제가 방해물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왜요. 우린 이미 이혼했고, 회사에서도…"
"제가 대표님 곁에 있으니까요."
도현의 손가락이 노트북 트랙패드를 눌렀다. 다음 사진이 떴다.
지수의 숨이 멎었다.
사진 속엔 도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도 있었다.
복도 끝에서 도현과 나란히 걷는 자신. 회의실 문을 나서며 도현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주차장에서 도현의 차 옆에 서 있는 뒷모습.
"이건…"
"우리 둘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건우 씨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남이 아니라는 걸."
지수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많이?'
사진은 계속 이어졌다.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 최근 두 달간 찍힌 사진만 서른 장이 넘었다.
"어떻게 이걸 손에 넣으셨어요."
"건우 씨 노트북을 해킹했습니다."
도현의 대답은 담담했다.
"불법이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수는 그를 돌아봤다. 운전석에 앉은 도현의 얼굴은 그림자 속에 있었다. 주차장 천장의 형광등이 그의 윤곽만 흐릿하게 비췄다.
"당신, 위험해요."
지수가 말했다.
"건우가 이미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걸…"
"제가 위험한 게 아닙니다."
도현이 그녀를 봤다.
"대표님이 위험합니다."
지수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무슨…"
"건우 씨는 절 제거하려는 게 아닙니다. 절 이용하려는 겁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표님을 고립시키기 위해서요."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고립?'
"제 생각엔 이렇습니다."
도현이 노트북을 덮었다. 좁은 차 안이 어두워졌다.
"건우 씨는 대표님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떼어낼 겁니다. 먼저 저를 제거하고, 그다음엔 팀장들, 임원진 순서로. 그렇게 대표님을 완전히 혼자 만든 다음…"
"그다음엔?"
"협박하겠죠."
도현의 눈빛이 차가웠다.
"회사를 넘기라고."
지수는 숨을 참았다. 차 안 공기가 무거웠다.
'회귀 전엔 그렇게 됐었지.'
건우가 자신을 고립시켰다.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매수하거나 협박해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마지막엔 정말 혼자였다. 그리고…
'죽었어.'
"대표님."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괜찮아요."
"거짓말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손이 떨리고 있습니다."
지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무릎 위에 올린 손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이래.'
회귀 후 처음이었다. 이렇게 통제가 안 되는 건.
"제 손 좀 잡아주실래요."
지수가 말했다. 자신도 놀랐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도현이 움직였다. 그의 손이 다가왔다. 따뜻했다. 지수의 떨리는 손을 감쌌다.
"이렇게요?"
도현이 물었다.
지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손바닥이 자신의 손등을 덮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너무 따뜻해.'
회귀 전엔 이런 적 없었다. 도현이 자신의 손을 잡은 적이.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땐 느끼지 못했으니까.
"대표님."
도현이 불렀다.
"전 당신을 지킬 겁니다."
지수의 눈이 뜨거워졌다.
"왜요."
"…예?"
"왜 저를 지키려고 하세요."
지수가 물었다.
"우린 이미 남이잖아요. 이혼했고, 회사에서도 그냥 상사와 부하 관계고. 그런데 왜…"
"그게 제 선택이니까요."
도현이 대답했다.
"제가 당신 곁에 있기로 한 겁니다."
지수는 그를 봤다. 어둠 속에서 도현의 얼굴은 평소보다 가까웠다.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좁았나.
"선택이라니."
지수가 속삭였다.
"당신 진짜 마음은 뭐예요."
도현의 손이 멎었다.
"…진짜 마음이요."
"네."
지수는 그의 눈을 놓치지 않았다.
"저를 지키려는 게 정말 동맹자로서인가요. 아니면…"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침묵이 흘렀다.
도현이 손을 놓았다. 차가운 공기가 손등을 스쳤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중에, 건우 씨를 막은 다음에…"
"싫어요."
지수가 말했다.
"지금 말해줘요."
"대표님."
"지금이요."
지수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 사람의 진심을 알고 싶어.'
회귀 전 타임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안 됩니다."
"왜요."
"제 마음을 말하면 대표님이 흔들릴 겁니다."
지수의 입술이 떨�렸다.
"흔들린다고요?"
"네."
도현이 그녀를 봤다.
"그럼 연기가 무너집니다."
지수는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조여왔다.
'이 사람은 알고 있어.'
자신이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걸.
"그럼 언제요."
지수가 물었다.
"언제 말해줄 건데요."
도현의 손가락이 핸들을 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건우 씨를 막은 다음에."
"그게 언제인데요."
"모릅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그전까진 안 됩니다."
지수는 차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알겠어요."
그녀는 내렸다.
"그럼 회사에서 뵙죠."
"대표님."
도현이 불렀다.
지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일부터 연기 시작합니다. 준비하세요."
문을 닫았다.
***
다음 날 아침.
지수는 회사 로비에서 도현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도현이 인사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차가웠다.
지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섞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은 침묵이었다.
다른 직원들이 눈치를 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표와 전무는 복도에서 대화를 나눴었다. 그런데 오늘은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연기 시작이네.'
지수는 층수 표시를 바라봤다. 도현의 체온이 옆에서 느껴졌다. 손끝이 간질거렸다.
'어제 그 손의 온기가 아직도…'
12층에서 문이 열렸다.
도현이 먼저 내렸다. 지수는 한 박자 늦게 따라 나왔다.
복도 끝에서 건우가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수 씨."
그가 웃으며 다가왔다.
"어, 도현 전무도 계시네요."
도현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건우의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갔다.
"요즘 사이가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으세요?"
지수는 표정을 지웠다.
"별일 없어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건우가 도현을 봤다.
"전무님, 오늘 오후에 시간 되시나요? 제가 새 프로젝트 건으로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확인해보겠습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건우가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복도가 다시 조용해졌다.
지수는 도현을 봤다. 그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조심하라는 거겠지.'
오전 회의가 시작됐다.
지수는 회의실 상석에 앉았다. 도현은 반대편 끝에 있었다.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그럼 이번 분기 실적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팀장이 발표를 시작했다.
지수는 자료를 보는 척했다. 시선은 계속 도현에게 갔다. 그는 노트북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저 사람도 연기하고 있는 건가.'
회의가 끝날 무렵, 건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늦었네요."
그는 빈 의자에 앉았다. 지수 바로 옆이었다.
"별일 없었죠?"
"네."
지수가 답했다.
건우의 손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지수의 손 가까이에 놓였다.
"요즘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그래도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건우가 웃었다.
지수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건우의 손끝이 자신의 손등을 스친 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런 거야.'
회의실 반대편에서 도현이 일어났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 전무님."
건우가 불렀다.
"오후에 시간 되신다고 하셨죠?"
도현이 멈췄다.
"…네."
"그럼 세시에 제 사무실로 오세요.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혔다.
지수는 건우를 봤다.
"무슨 얘기인데요."
"아, 별거 아니에요."
건우가 웃었다.
"그냥 업무 조율 좀 하려고요."
지수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가 이상해.'
***
오후 세시.
지수는 복도 구석에 서 있었다. 건우의 사무실 문이 보이는 위치였다.
'도현이 들어가면…'
문이 열렸다.
도현이 나왔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지수는 그를 불렀다.
"전무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대표님."
"무슨 얘기 하셨어요."
도현이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여기선 안 됩니다."
그가 속삭였다.
"옥상으로 오세요. 5분 후에."
그는 걸어갔다.
지수는 시계를 봤다. 손이 떨렸다.
'5분.'
3분이 지났다.
지수는 옥상 문을 열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어놓았다.
도현이 난간 옆에 서 있었다.
"왔습니다."
지수가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도현이 그녀를 봤다. 눈빛이 어두웠다.
"건우 씨가 알고 있습니다."
"뭘요."
"우리가 어제 주차장에서 만난 걸요."
지수의 심장이 멎었다.
"…어떻게."
"CCTV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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