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약 14분 · 총 6,861자

침묵하는 심장

주인공: 한지수

촛불이 흔들렸다.

한지수는 테이블 너머의 남자를 봤다. 최도현. 그녀의 남편이자 회사 전무. 회귀 전엔 투명인간 취급했던 사람.

'지금은 달라.'

심장이 뛰었다. 아니, 정확히는 조여들었다. 갈비뼈 사이로 무언가 비집고 들어와 쥐어짜는 것 같았다.

"메뉴 정하셨습니까."

웨이터가 다가왔다. 도현이 메뉴판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샤토 마고 2015년산으로 주세요."

지수의 손이 멈췄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와인이잖아.'

회귀 전, 결혼 3년 차 기념일에 마셨던 와인. 도현은 그날 처음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걸 기억했다며 수줍게 웃었었다.

'근데 지금은 이혼 직전이야. 우리 사이가 최악일 때인데.'

"전무님."

지수의 목소리가 나왔다. 생각보다 차분했다.

"그 와인… 어떻게."

도현이 그녀를 봤다. 1초. 2초. 표정은 평온했다.

"회사 접대 때 자주 쓰는 와인입니다."

거짓말이었다.

지수는 알았다. 도현의 왼쪽 검지가 미세하게 떨렸으니까. 긴장하면 나타나는 버릇. 회귀 전엔 몰랐지만, 죽기 직전 그의 손을 붙잡았을 때 느꼈던 떨림이 지금도 생생했다.

'너도… 뭔가 숨기고 있는 거지?'

웨이터가 물러갔다.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수는 냅킨을 펼치며 말했다.

"요즘 전무님이 이상해요."

"어떤 점에서요."

"예전엔 저랑 밥 먹자는 말도 안 하셨잖아요."

도현의 시선이 촛불로 향했다.

"…대표님께서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그래도 거절 안 하셨잖아요."

지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촛불 너머로 도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왜요?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거예요?"

도현이 그녀를 봤다. 눈빛이 복잡했다.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말해줘. 제발.'

하지만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업무 보고 드릴 게 있어서요."

거짓말.

지수는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눈은 웃지 않는 미소.

"업무 보고는 회의실에서 하면 되는데."

"…."

"굳이 이런 곳까지 올 필요 없잖아요."

도현의 턱선이 굳었다. 지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어. 분명히.'

와인이 나왔다. 웨이터가 능숙하게 따르고 물러갔다. 지수는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체리. 바닐라. 그리고 오크통의 은은한 나무 향.

'…맞아. 이거였어.'

첫 모금을 머금었다. 혀끝에서 기억이 번졌다. 3년 전 그날, 도현이 서툴게 축배를 제안했을 때의 온기.

'그땐 왜 몰랐을까.'

지수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예전에 이런 적 있었잖아요."

도현의 손이 멈췄다.

포크를 든 손. 그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결혼 3년 차 기념일이요."

지수가 조용히 말했다.

"전무님이 이 와인 주문하셨었잖아요. 그때 처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걸 기억해주셨다고."

도현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졌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포크를 쥔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지수는 가슴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폐 안의 공기가 모자란 것처럼 숨이 얕아졌다.

'왜 거짓말을 해. 왜.'

"…그래요?"

지수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했다.

"정말 기억 안 나세요?"

도현이 그녀를 봤다. 눈빛이 너무 복잡했다. 슬픔인지 후회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네. 기억나지 않습니다."

거짓말쟁이.

지수는 웃었다. 입술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그럼… 다른 건요?"

"다른 게 뭡니까."

"제가 비 오는 날 우산 안 챙기는 거. 커피에 설탕 세 스푼 넣는 거. 왼쪽 귀에만 귀걸이 하는 버릇."

지수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것도 다 잊으셨어요?"

도현의 턱이 굳었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대표님."

그가 말했다. 목소리에 금이 갔다.

"왜 갑자기 이러십니까."

"이상해서요."

지수가 몸을 더 앞으로 기울였다. 촛불이 둘 사이에서 흔들렸다.

"전무님이 너무 달라졌어요. 예전엔 저한테 관심도 없으셨잖아요."

"…."

"근데 요즘은 자꾸 저를 보세요. 제가 뭘 하는지, 어디 가는지, 누구랑 있는지."

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뭐가 달라진 거예요?"

"…아무것도."

"거짓말."

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전 알아요. 전무님 왼손 검지가 떨리는 거. 긴장하면 나타나는 버릇이잖아요."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지수가 웃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야… 제가 전무님을…."

말이 끊어졌다.

'사랑했으니까.'

# 침묉하는 심장 (Part 2/3)

"그야… 제가 전무님을…."

지수의 입술이 떨렸다. 말이 목구멍에서 막혔다.

'사랑했으니까.'

그 말을 뱉어낼 수가 없었다. 혀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도현이 천천히 냅킨을 내려놓았다.

"대표님."

그의 목소리가 낮았다.

"오늘은 이만…."

"아니요."

지수가 끼어들었다. 심장이 귀 옆에서 뛰는 게 느껴졌다.

"아직 안 끝났어요."

"무엇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우리 얘기요."

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1초. 2초.

그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일어서려는 거였다.

지수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탁.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 셔츠 소매 위로 느껴지는 체온이 뜨거웠다.

'…처음이야.'

회귀 후 처음으로 그녀가 먼저 그를 붙잡은 순간.

도현의 몸이 굳었다. 근육이 돌처럼 단단해졌다.

지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도망치지 마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차분하게 하려 했는데 실패했다.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지수의 손으로, 그리고 얼굴로 향했다.

"…제가 도망치는 게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에 균열이 있었다.

침묵.

촛불이 흔들렸다. 레스토랑 안의 웅성거림이 멀어졌다.

도현이 덧붙였다.

"지수 씨가… 저를 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맞아.'

지수는 손에 힘을 뺐다. 도현의 손목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랬죠."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는 전무님을 안 봤어요. 3년 내내."

도현의 턱선이 굳었다.

"근데 이상한 건요."

지수가 그를 똑바로 봤다. 눈가가 뜨거웠다.

"지금은 보고 있는데… 전무님이 저를 안 보시잖아요."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그가 한 발짝 물러섰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지수 씨."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제가 기억하는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기가 얼었다.

지수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 말은….'

회귀를 알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단순히 최근의 변화를 말하는 건가.

"무슨… 뜻이에요?"

지수가 물었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그녀를 봤다. 너무 오래, 너무 깊이.

그리고 돌아섰다.

"전무님!"

지수가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도현은 멈추지 않았다. 레스토랑 출구로 걸어갔다.

지수는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봤다.

'…가지 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입술을 깨물었다.

도현이 문을 열고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지수는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그의 와인 잔이 남아 있었다. 반쯤 비어 있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문자 알림.

발신자: 박건우.

'…건우?'

손가락이 굳었다.

회귀 전, 그녀를 배신하고 죽인 남자. 아직 그는 지수의 인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근데 왜 지금.'

문자를 열었다.

**"지수 씨,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

'…뭘 말하려고.'

회귀 전, 건우는 회사 투자자로 처음 나타났었다. 도현과의 이혼 직후.

'근데 지금은 아직 이혼 전이야.'

타이밍이 다르다.

지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건우의 이름이 빛났다.

'답장을 해야 하나.'

아니, 애초에 그를 만나야 하는가.

회귀 전처럼 흘러가게 두면 도현과 이혼하고 건우와 재혼한다. 그리고 죽는다.

'…바꿔야 해.'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그때 레스토랑 문이 열렸다.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었다.

'…왜?'

그는 나갔었다. 분명히 떠났었다.

도현이 천천히 걸어왔다.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눈빛이 달랐다.

뭔가 결심한 사람의 눈.

그가 지수 앞에 멈춰 섰다.

"대표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지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왔다.

"…뭔데요."

도현이 그녀를 똑바로 봤다.

"대표님은 지금… 저를 시험하고 계십니까."

숨이 멎었다.

"무슨…."

"아니면."

도현이 한 발짝 다가섰다. 테이블 너머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정말로… 달라지신 겁니까."

촛불이 둘 사이에서 흔들렸다.

지수는 그를 올려다봤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현의 눈빛이 너무 간절했다.

'…저 눈.'

# 침묵하는 심장 (Part 3/3)

'…저 눈.'

지수는 숨을 삼켰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시험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전 그냥…."

말을 잇지 못했다. 도현의 눈빛이 너무 가까웠다.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섰다. 테이블 모서리가 그의 허벅지에 닿았다.

"그냥?"

"…후회하는 거예요."

지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이 열렸다.

"무엇을."

"전부요."

지수가 그를 똑바로 봤다. 눈가가 뜨거웠다.

"전무님한테 했던 것. 안 했던 것. 다요."

침묵이 흘렀다.

도현의 턱선이 굳었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니에요."

지수가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테이블 하나만 남았다.

"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뭘."

"제가 얼마나 바보였는지."

도현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왼쪽 검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또 긴장하고 있어.'

지수는 그 손을 봤다. 가슴이 조였다.

"전무님."

그녀가 테이블을 짚었다. 손바닥이 차가운 대리석에 닿았다.

"저…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왜 거짓말하세요?"

그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졌다.

"무슨…."

"기억 안 난다고 하셨잖아요. 그날 와인. 기념일."

지수가 한 발짝 다가섰다. 테이블 모서리가 허벅지에 닿았다.

"근데 전무님 손은 떨리고 있어요. 지금도."

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

"왜요?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알아버리는 게? 아니면…."

말을 멈췄다. 심장이 귀 옆에서 뛰었다.

"제가 달라진 게?"

도현의 입술이 열렸다.

"지수 씨."

목소리에 금이 갔다.

"당신은…."

그가 말을 멈췄다. 주먹을 쥔 손이 떨렸다.

지수는 손을 뻗었다.

도현의 주먹 위에 손을 올렸다. 뜨거웠다.

"말해줘요."

그녀가 속삭였다.

도현의 눈이 커졌다. 지수의 손을 내려다봤다.

"…안 됩니다."

"왜요."

"당신이… 모르는 게 나으니까."

"전 알고 싶어요."

지수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도현의 턱이 떨렸다. 입술이 파르르 움직였다.

"지수 씨는…."

그가 천천히 말했다.

"저를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맞아.'

지수는 손에 힘을 뺐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랬죠."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데 지금은요?"

도현이 그녀를 봤다. 눈빛이 너무 슬펐다.

"지금도… 아니실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은 안 변하니까요."

지수가 웃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변해요. 사람은 변할 수 있어요."

"…."

"전 변했어요. 전무님."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수는 테이블을 돌았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둘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믿어줄 수 있어요?"

그녀가 올려다봤다. 목소리가 떨렸다.

도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못 믿습니다."

"왜요."

"너무 늦었으니까."

지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늦었다고?'

"무슨… 뜻이에요?"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턱선이 굳었다.

"저는 이미…."

말이 끊어졌다.

지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셔츠 소매가 구겨졌다.

"이미 뭐요? 말 다 해요."

"…포기했습니다."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당신을."

숨이 멎었다.

지수는 그를 올려다봤다. 눈가가 뜨거웠다.

"언제요."

"오래전에."

"거짓말."

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거짓말이에요. 그럼 왜 자꾸 저를 봐요? 왜 제가 어디 가는지 신경 써요?"

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습관입니다."

"습관?"

"끊을 수 없는."

그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풀었다. 손가락이 하나씩 떨어졌다.

"그러니까 제발…."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러지 마십시오."

지수는 할 말을 잃었다.

도현이 한 발짝 물러섰다. 둘 사이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전 이제… 괜찮습니다."

거짓말쟁이.

지수는 그의 얼굴을 봤다. 눈빛이 너무 아팠다.

'…괜찮을 리 없잖아.'

도현이 돌아섰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가 걸어갔다. 레스토랑 출구로.

지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가지 마.'

입술이 떨렸다.

'제발.'

도현이 문을 열었다.

"전무님!"

지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등이 굳었다.

"전 거짓말 안 해요."

지수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변했다는 거. 후회한다는 거. 다 진짜예요."

침묵.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총 6,861자 · 약 14분

- 2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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