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문 앞의 선택
주인공: 강한결
비명이 끊겼다.
폐공장 안에서 터진 빛이 깨진 창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파랗고 차가운, 살아 있는 것의 빛이 아니었다.
한결의 손이 떨렸다. 칼자루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풀렸다 반복했다.
'죽인다. 죽여라. 죄인의 목을 베어라.'
시우의 목소리가 뇌 속을 긁었다.
"닥쳐."
한결은 이를 악물었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혀를 깨문 것 같았다.
'네 가족도 저렇게 죽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기억나느냐, 강한결.'
"닥치라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한결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감아도 보였다. 15년 전 그날 밤. 엄마의 목걸이. 동생의 인형. 아버지의 시계.
전부 피로 얼룩진 채로.
"한결 씨!"
박문수의 외침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한결 옆에 서서 폐공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저승의 기운이... 너무 짙어요. 안에 뭔가 있어요."
"알아."
한결은 짧게 대답했다. 칼을 든 손에 힘을 줬다. 시우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들어가라. 들어가서 목을 베어라. 그것이 네 운명이다.'
"...별수 없지."
중얼거리며 한결은 발을 뗐다. 공장 쪽으로. 박문수가 황급히 팔을 잡았다.
"지금 들어가면 안 돼요! 저 안은—"
"놔."
한결이 팔을 뿌리쳤다. 박문수가 비틀거렸지만 다시 앞을 막았다.
"당신 지금 눈 봐요. 반쯤 넘어갔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제발... 칼 좀 놔요. 제가 들어갈게요."
박문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결은 그를 쳐다봤다. 눈빛이 식어 있었다.
"넌 약해."
"...알아요."
"약한 놈이 들어가면 죽어."
"그래도..."
박문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손이 주머니 안 염주를 만졌다.
"그래도 전 17명 죽였어요. 속죄해야 해요. 당신까지 잃을 순 없어요."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박문수를 밀쳐내고 걸었다. 공장 입구의 철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낮고, 느리고, 비틀린 웃음.
"크크크... 왔구나."
한결의 발이 멈췄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저 목소리.
김철호.
철문이 삐걱거리며 완전히 열렸다. 안에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멀쩡했다.
옷에 핏자국 하나 없었다. 얼굴에 상처도 없었다. 15년 전 그날, 법정에서 봤던 그 비웃음이 입가에 걸려 있었다.
"죽지도 않았어...?"
한결의 입에서 신음 같은 말이 새어 나왔다. 칼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김철호는 천천히 다가왔다. 구두 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쳤다.
딱. 딱. 딱.
"의식은 이제 시작이야."
김철호가 멈춰 섰다. 한결과 5미터 거리.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네 가족도 이랬어. 15년 동안 기다렸지. 저승 문 앞에서."
"닥쳐!"
한결이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김철호는 웃고 있었다.
칼이 목을 스치는 순간, 파란 빛이 터졌다.
쨍—!
칼이 튕겨 나갔다. 한결의 손목이 꺾이며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저승과 계약한 몸이거든."
김철호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의 목 주변에 희미한 푸른 장막이 일렁이고 있었다.
"네 칼은 안 통해. 유감이네."
한결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었다.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시우의 목소리가 폭주했다. 한결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한결 씨!"
박문수가 달려왔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멈춰라."
낮고 차가운 목소리. 무학이었다.
그는 공장 옆 골목에서 걸어 나왔다. 손에는 붉은 천으로 싼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천에서 묘한 기운이 흘렀다.
"쇄혼부..."
박문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학 스님, 안 돼요!"
"비켜라, 박문수."
무학은 천을 풀기 시작했다. 안에서 붉은 부적이 드러났다. 부적에는 검은 글씨로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저 인간은 이미 칼에 잠식됐다. 더 늦으면 시우가 완전히 깨어난다."
"아직 아니에요! 아직 한결 씨 의식이 남아 있어요!"
박문수가 무학 앞을 막았다. 무학은 눈썹을 찌푸렸다.
"네가 3년 전 어떻게 됐는지 잊었느냐. 17명을 죽이고 나서야 칼을 놨지."
"그래서 더 알아요! 한결 씨는 아직 한 명도 안 죽였어요!"
"김철호는?"
"...저승과 계약한 몸이에요. 죽일 수 없어요."
무학이 코웃음 쳤다.
"그럼 다음 놈을 죽이겠지. 그 다음, 또 그 다음."
그는 박문수를 밀쳐내고 부적을 들어 올렸다. 부적에서 붉은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한결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김철호에게 박혀 있었다.
무학의 부적이 붉게 타오르는 소리도, 박문수가 뭔가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여라. 지금 당장.'
시우의 목소리가 뇌를 파고들었다. 한결의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칼을 든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한결!"
박문수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결의 팔꿈치가 그의 명치를 쳤다.
퍽—
박문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렸다.
"비켜."
한결의 목소리였지만 한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차갑고, 500년 전 누군가의 목소리.
김철호가 담배를 입에 문 채 웃었다.
"왔네. 시우."
"죄인아."
한결이 칼을 들어 올렸다. 칼날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조아려라."
"15년 전에도 그랬어."
김철호가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구두로 비벼 껐다.
"네 가족한테도 똑같이 말했지. '살려달라고 빌어봐.' 근데 안 빌더라. 네 엄마."
칼이 허공을 갈랐다.
쨍—!
또 튕겨 났다. 푸른 장막이 김철호를 감쌌다. 한결의 손목에서 피가 더 흘렀다.
"아빠는 빌었어. '딸만은 살려달라'고."
"닥쳐라!"
한결이 다시 휘둘렀다.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칼날이 김철호의 어깨를 향했다.
쨍—!
세 번째. 장막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김철호가 한 발짝 다가왔다. 여유로웠다.
"근데 딸은 안 빌었어. 꼬맹이가 나한테 침을 뱉더라고."
한결의 몸이 굳었다.
동생.
열 살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죽였지."
"으아아아아!"
한결이 칼을 난도질했다. 위, 아래, 옆, 대각선. 정신없이 휘둘렀다.
쨍! 쨍! 쨍!
전부 튕겨 났다. 손목이 삐걱거렸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김철호는 웃고 있었다.
"더 해봐. 재밌어."
그때 뒤에서 무학의 목소리가 터졌다.
"쇄혼!"
붉은 부적이 한결의 등에 날아왔다. 부적이 닿는 순간, 한결의 몸이 얼어붙었다.
"크윽..."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몸속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시우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놓지 마라... 놓으면... 끝이다...'
"놓아, 강한결."
무학이 다가왔다. 손에 두 번째 부적을 들고 있었다.
"칼을 놓으면 살려준다."
한결의 손이 떨렸다. 칼자루에서 손가락이 하나씩 펴지기 시작했다.
"안 돼요!"
박문수가 바닥을 기며 소리쳤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칼 놓으면 김철호 못 죽여요!"
"죽일 필요 없다."
무학이 차갑게 말했다. 시선이 김철호에게 향했다.
"저놈은 내가 처리한다."
김철호가 코웃음 쳤다.
"스님이? 어떻게?"
"쇄혼부는 두 장이다."
무학이 두 번째 부적을 들어 올렸다. 부적에서 더 강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는 시우를. 하나는 저승의 계약을."
김철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미친놈."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러라."
무학이 부적을 던지려는 순간, 폐공장 안에서 빛이 터졌다.
파아아아—
푸른 빛이 아니었다. 검붉은, 썩은 피 같은 빛이었다.
공장 문이 활짝 열렸다.
안에서 거대한 문이 보였다. 높이 5미터는 족히 되는, 낡은 나무로 만들어진 문.
문틈 사이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저승문."
무학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동요한 표정이었다.
김철호가 뒤로 물러났다. 공장 안쪽으로. 문 앞으로.
"늦었어, 스님."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목걸이. 인형. 시계.
한결의 숨이 멎었다.
"이제 의식 시작한다."
김철호가 제단 위에 유품들을 올려놓았다. 제단은 문 바로 앞에 있었다.
"15년 동안 저승 문턱에서 기다린 혼들이야. 오늘 내가 완전히 먹어 치운다."
검은 안개가 유품을 감쌌다. 안개 속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 남자. 아이.
한결의 가족.
"엄마..."
한결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에서 칼이 떨어질 뻔했다.
등에 붙은 부적이 타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동생... 아빠..."
형체들은 말이 없었다. 그저 김철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눈이 없었다.
"한결아."
김철호가 웃었다.
"들어와. 직접 데려가."
한결의 발이 움직였다. 공장 안으로.
"멈춰라!"
무학이 부적을 던졌다. 부적이 한결의 등에 두 번째로 붙었다.
"크윽!"
한결이 무릎을 꿇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일어나라... 일어나...'
시우의 목소리도 약해졌다. 부적이 시우를 잠재우고 있었다.
"못... 가..."
한결이 바닥을 짚었다. 손톱이 콘크리트를 긁었다.
"가야... 해..."
"가면 죽어요!"
박문수가 기어와 한결의 어깨를 잡았다. 눈물이 흘렀다.
"저 안 들어가면 영원히 못 나와요
# Part 3: 위기-클리프행어
"가면 죽어요!"
박문수가 한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박문수의 손을 뿌리쳤다.
"비켜요."
목소리가 낮았다. 떨리지 않았다.
"한결 씨!"
"비키라고요."
한결이 일어섰다. 등에 붙은 부적 두 장이 활활 타올랐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크윽..."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발, 또 한 발. 저승문을 향해.
무학이 세 번째 부적을 꺼냈다.
"마지막 경고다. 저 문 안 들어가면—"
"들어갈 거예요."
한결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반쯤 붉었다. 반쯤은 검었다.
"15년 기다렸어요. 이제 끝낼 거예요."
"끝나는 건 네 목숨이다!"
무학이 부적을 던졌다. 부적이 한결의 이마를 향해 날아왔다.
그 순간.
칼이 움직였다.
챙—
칼날이 부적을 두 쪽으로 갈랐다. 부적이 공중에서 재가 되어 흩어졌다.
"...뭐?"
무학의 얼굴이 굳었다.
한결이 칼을 들어 올렸다. 칼날에서 검은 기운과 붉은 기운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시우... 힘 빌려줘.'
'...각오는 됐느냐.'
'됐어요.'
'거짓말.'
시우의 목소리가 비웃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넌 이미 끝났으니까.'
한결의 눈이 완전히 붉게 변했다.
아니.
한쪽만.
왼쪽 눈은 붉었다. 오른쪽 눈은 여전히 검었다.
"이게... 뭐야..."
무학이 뒤로 물러났다.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한결이 입을 열었다.
"죄인아."
시우의 목소리.
"...미안해요."
한결의 목소리.
두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김철호가 제단 앞에서 박수를 쳤다.
"오, 재밌네. 반반씩 나눠 가졌어?"
한결이 걸었다. 저승문을 향해.
"들어와봐. 네 가족 만나게 해줄게."
검은 안개 속에서 형체들이 더 또렷해졌다.
엄마가 손을 뻗고 있었다.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한결아.'
환청이었을까.
아니었다.
동생도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빠.'
한결의 발이 멈췄다.
칼을 쥔 손이 떨렸다.
'가면 안 돼. 저건 함정이야.'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한결 자신의 목소리였다.
'알아.'
'그럼 왜—'
'그래도 가야 해.'
한결이 다시 걸었다.
박문수가 뒤에서 외쳤다.
"쇄혼부로도 안 되면... 이것밖에 없어요!"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결이 돌아봤다.
박문수가 자기 손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저주받은 피예요... 17명 죽인 피..."
박문수의 손목에서 피가 흘렀다. 피가 바닥에 떨어지자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를 녹였다.
"이걸 저승문에 뿌리면... 문이 닫혀요..."
"미쳤어요?"
한결이 달려갔다. 박문수의 손목을 잡았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는데요!"
"괜찮아요."
박문수가 웃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지만 웃고 있었다.
"전 이미... 끝난 사람이에요..."
"닥쳐요!"
한결이 박문수의 손목을 쥐어짰다. 피가 멎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속죄하지 마요!"
"...한결 씨는요?"
박문수가 물었다.
"한결 씨는 어떻게 속죄할 건데요?"
한결의 입이 다물어졌다.
"15년 동안 복수만 생각하고 살았죠? 사람들 피하고, 혼자 살고, 아무도 안 믿고."
"..."
"그것도 속죄예요. 자기 자신한테."
박문수가 한결의 손을 뿌리쳤다. 피 묻은 손으로 저승문을 향해 걸었다.
"전 17명 죽였어요. 한결 씨는 아무도 안 죽였어요."
"그만해요!"
"그러니까 제가 먼저 갈게요. 저승에."
박문수가 손을 들어 올렸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바닥이 녹았다.
김철호가 웃음을 멈췄다.
"야, 잠깐—"
박문수가 손을 휘둘렀다.
피가 저승문에 뿌려졌다.
치지직—!
문이 흔들렸다. 검은 안개가 요동쳤다.
형체들이 일그러졌다.
"안 돼!"
한결이 달려들었다. 박문수를 밀쳐냈다.
"왜 그래요! 왜!"
"당신이 들어가면 안 돼요!"
박문수가 소리쳤다. 눈물이 흘렀다.
"당신은... 아직 살아야 해요..."
"무슨 소리예요!"
"17명 중에... 한 명... 살았어요..."
한결의 몸이 굳었다.
"...뭐?"
"제가... 3년 전... 칼 들었을 때..."
박문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 명... 놓쳤어요... 꼬마였어요... 여섯 살..."
"그게 무슨..."
"그 애가 당신 동생 딸이에요."
세상이 멈췄다.
한결의 귀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거짓말."
"진짜예요. 보육원에 있어요. 이름은—"
그때 저승문이 완전히 열렸다.
콰아아아—!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안개가 박문수를 집어삼켰다.
"으아아악!"
박문수가 비명을 질렀다. 몸이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박문수!"
한결이 손을 뻗었다.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