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의 거래
주인공: 강한결
검은 안개가 박문수를 집어삼켰다.
"...안 돼."
한결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박문수의 손끝이 스쳐 지나갔지만 잡히지 않았다. 안개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가, 가람... 보육원...!"
박문수의 목소리가 끊겼다. 마지막 글자가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한결이 앞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저승문이 요동쳤다. 쿵.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압력이 사방을 짓눌렀다.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그 안에서 뭔가 나오고 있었다.
"뭐야..."
한결의 발이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2미터는 족히 넘는 키. 온몸을 감싼 검은 천.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텅 빈 어둠만 있었다.
저승사자.
그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강한결."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산 자의 것이 아닌 소리.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계약 당사자로다."
"...무슨 소리야."
한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계약? 나는 아무것도 한 적 없는데.
저승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발소리가 없었다. 바닥에 닿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네가 맺은 게 아니로다."
긴 팔이 천 속에서 나왔다. 뼈만 앙상한 손. 그 손에 낡은 장부가 들려 있었다.
한결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시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저승사자가 장부를 펼쳤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로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2009년 3월 17일. 김철호. 생명 15년 연장."
한결의 숨이 멎었다.
"담보. 강민서, 모. 강지우, 남동생."
안 돼.
"강예린, 조카. 당시 미출생."
세상이 기울었다.
"...거짓말."
한결의 입술이 떨렸다. 예린이는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승의 거래는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미래의 영혼도 담보가 될 수 있느니라."
저승사자의 손가락이 장부를 짚었다. 붉은 글자가 번졌다.
"김철호는 네 가족을 죽인 게 아니로다. 거래했을 뿐."
"...아니야."
한결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이 안 돼. 15년 동안 내가 믿어왔던 게 전부 거짓이라고?
"계약 만료일은 오늘. 자정."
저승사자가 장부를 덮었다.
"김철호가 죽으면 담보는 즉시 소멸된다."
한결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쨍그랑. 금속음이 폐공장 바닥에 울렸다.
"네가 복수를 완수하는 순간, 네 가족은 영원히 사라진다."
"...그럼."
한결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깔렸다.
"내가 김철호를 살려두면... 가족은?"
"15년이 지났다. 계약은 만료됐느니라."
저승사자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 없는 어둠이 한결을 바라봤다.
"김철호가 살든 죽든, 담보는 회수된다. 7일 후 자정. 그때까지 네가 선택하지 않으면."
검은 천 사이로 뼈손이 세 개를 펼쳤다.
"셋 모두 데려간다."
한결의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손을 짚었다. 차가운 콘크리트가 손바닥을 얼렸다.
'이게... 뭐야...'
15년. 매일 밤 악몽을 꾸며 버텼던 시간. 복수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날들. 그 모든 게 무너졌다.
"선택하라, 강한결."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복수를 포기하고 가족을 놓아줄 것인가. 복수를 완수하고 가족을 소멸시킬 것인가. 아니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네 영혼을 내놓을 것인가."
한결의 손톱이 바닥을 긁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
'...시우.'
한결이 속으로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시우!'
'...이건 천명이 아니로다.'
시우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처음 듣는 어조였다. 당황. 혼란. 두려움.
'나는... 죄인을 처단하는 자. 하나 이는...'
시우의 말이 끊겼다.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저승문을 봤다. 검은 안개 너머로 뭔가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손.
여섯 살 아이의 손.
"...오빠...?"
한결의 심장이 멎었다.
예린이 목소리였다.
"예린아!"
한결이 일어나 달려갔다. 저승문이 요동쳤다.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튀었다.
작은 손이 안개 사이로 뻗어 나왔다. 하얗고 차가운 손. 한결의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
"안 된다."
저승사자가 한결의 어깨를 잡았다. 뼈손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한결의 몸이 뒤로 튕겨 났다.
"아직 때가 아니로다."
저승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작은 손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예린아! 예린아!"
한결이 소리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저승문이 완전히 닫혔다. 폐공장 벽에 그려진 문양만 남았다.
한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7일."
저승사자가 뒤돌아섰다.
"그때까지 선택하라. 선택하지 않으면 네 영혼도 함께 가져간다."
검은 안개가 저승사자를 감쌌다.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말이 들렸다.
"참고로, 박문수는 아직 살아있다.
검은 안개가 흩어졌다. 저승사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결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콘크리트를 너무 세게 긁었다.
"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긴 게 아니라 터져 나왔다.
'15년. 15년을...'
복수를 위해 버텼다. 매일 밤 칼을 갈았다. 김철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게 전부 헛짓이었다.
"씨발."
한결이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손등이 찢어졌다. 아프지 않았다.
'시우.'
대답이 없었다.
'시우!'
한결이 속으로 소리쳤다. 목 안쪽이 뜨거웠다. 화상 자국이 욱신거렸다.
'...나는.'
시우의 목소리가 겨우 들렸다. 멀고 희미했다.
'죄인을 처단하는 자로다. 하나 저것은... 저것은 나보다 위에 있느니라.'
'무슨 소리야.'
'저승사자. 저들은 천명을 집행하는 자가 아니라, 천명 그 자체니라.'
시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결은 처음 들어봤다. 시우가 두려워하는 소리를.
'네가 저들과 맞서면 나도 소멸된다. 그러니...'
'그러니 뭐.'
한결이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벽을 짚고 겨우 섰다.
'가만히 있으라는 거냐.'
시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저승문이 있던 벽을 봤다. 문양만 남았다. 예린이가 내민 작은 손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빠...?'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한결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별수 없지.'
한결이 칼을 집어 들었다. 망나니 칼. 손잡이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박문수부터 찾는다.'
'미쳤느냐! 저승사자가—'
'살아있다고 했어.'
한결이 칼을 허리에 찼다. 피 묻은 손으로 재킷을 여몄다.
'박문수가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 가람 보육원. 거기에 뭔가 있어.'
시우가 침묵했다. 한결은 폐공장 출구로 걸었다.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풀렸다. 난간을 붙잡았다.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괜찮아.'
한결이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몰랐다.
1층에 올라왔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웠다.
한결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이 깨져 있었다. 아까 넘어졌을 때.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등록된 번호가 세 개뿐이었다. 치킨집. 편의점. 무학.
'무학이한테는 말 못 해.'
무학이 알면 막을 거다. 경찰 부르고 한결을 병원에 처넣을 거다.
한결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폐공장 정문으로 나왔다.
밖은 고요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이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가람 보육원.'
한결이 걸으면서 기억을 뒤졌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박문수가 왜 그걸 말했을까.'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결이 멈췄다. 칼을 잡았다.
"누구."
대답 대신 웃음소리가 들렸다. 낮고 걸걸한 웃음.
한결이 돌아봤다.
남자가 서 있었다. 50대쯤 돼 보였다. 헐렁한 정장 차림. 넥타이가 삐뚤어져 있었다.
"강한결."
남자가 한결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한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김철호?"
남자가 활짝 웃었다. 이가 누렇게 썩어 있었다.
"15년 만이네. 많이 컸어."
한결의 손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저절로 움직였다.
"오."
김철호가 뒤로 물러났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짜 죽일 셈이야? 네 가족 영혼 날아가도?"
한결의 발이 멈췄다.
"...어떻게 알아."
"저승사자가 나한테도 왔거든."
김철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계약 만료됐다고. 7일 후면 내 목숨도 끝이라고."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말이야."
김철호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저승사자가 하나 더 말해줬어. 계약을 연장할 방법이 있대. 네가 날 살려주면."
"...뭐?"
"네 가족 영혼이랑 내 목숨이랑 바꿀 수 있대. 네가 복수 포기하면 돼."
김철호가 씩 웃었다.
"어때. 나쁘지 않잖아. 너도 가족 살리고, 나도 살고."
한결의 입술이 떨렸다.
'거짓말이야.'
시우가 속삭였다.
'저승사자는 그런 말 안 했느니라. 저자가 꾸며낸 것이로다.'
한결도 알았다. 김철호 눈빛이 거짓말쟁이 눈이었다.
"...안 믿어."
한결이 칼을 들어 올렸다.
"그래?"
김철호가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발로 비볐다.
"그럼 이건 어때."
김철호가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한결한테 던졌다.
사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결이 내려다봤다.
숨이 멎었다.
사진 속에 여자아이가 있었다. 여섯 살쯤.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예린이였다.
"어디서 구했어."
# Part 3: 위기-클리프행어
"쓰레기통에서."
김철호가 코웃음 쳤다.
"네 동생 집 앞. 버려진 박스에 들어 있더라고."
한결의 손이 떨렸다. 칼날이 흔들렸다.
"거짓말."
"믿든 말든."
김철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신기하더라. 애 얼굴이 네 동생이랑 똑같아."
한결이 칼을 휘둘렀다. 김철호의 목을 겨냥했다.
스읍.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김철호는 이미 뒤로 물러나 있었다.
"빠르긴."
김철호가 혀를 찼다.
"15년 동안 연습했나 보네."
한결이 다시 달려들었다. 칼이 김철호의 어깨를 스쳤다. 옷이 찢어졌다.
"시우!"
한결이 외쳤다. 목 안이 뜨거워졌다. 화상 자국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안 되느니라!'
시우가 비명처럼 말했다.
'저자를 죽이면 네 가족이—'
"닥쳐!"
한결의 눈이 붉게 변했다. 칼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김철호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그거."
한결이 대답 대신 칼을 내리쳤다. 김철호가 옆으로 굴렀다. 칼날이 바닥을 찍었다.
콰직!
아스팔트가 갈라졌다. 금이 사방으로 퍼졌다.
"미친놈."
김철호가 일어나 달렸다. 골목 안쪽으로.
한결이 쫓아갔다. 시야가 흔들렸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버텨...'
한결이 이를 악물었다. 칼을 질질 끌며 달렸다.
김철호가 모퉁이를 돌았다. 한결도 따라 돌았다.
골목이 끝났다. 막다른 길이었다.
김철호가 벽을 등지고 섰다. 숨을 헐떡였다.
"좋아."
김철호가 손을 들었다.
"네가 이겼어. 죽여. 대신."
김철호가 웃었다. 이가 드러났다.
"네 가족 영혼이 소멸되는 거 똑똑히 봐."
한결의 발이 멈췄다.
'...안 돼.'
손에서 힘이 빠졌다. 칼끝이 바닥을 향했다.
"그것 봐."
김철호가 허리를 폈다.
"못 죽이잖아. 15년 동안 갈고닦았는데."
한결이 고개를 숙였다. 칼을 쥔 손이 떨렸다.
'시우... 방법이 없어?'
시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시우!'
'...하나 있긴 하되.'
시우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네 목숨을 담보로 새 계약을 맺는 것이로다. 저승사자가 제안한 세 번째 선택지.'
'그럼 예린이는.'
'살 수 있느니라. 하나 너는.'
한결이 눈을 감았다.
'...그거면 돼.'
'미쳤느냐!'
시우가 소리쳤다. 한결의 머릿속이 울렸다.
'네가 죽으면 나도 사라진다! 그리고 네 조카는 혼자 남는다!'
'무학이가 있어.'
한결이 눈을 떴다. 김철호를 봤다.
'무학이가 예린이 키울 거야. 나보다 잘.'
'그게 아니라—'
한결이 칼을 들어 올렸다. 칼날을 자기 손목에 댔다.
김철호의 눈이 커졌다.
"뭐 하는 거야."
"거래."
한결이 중얼거렸다.
"저승사자. 들려?"
바람이 멎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김철호가 뒤로 물러났다.
"야, 이 새끼야. 진짜 미쳤어?"
한결이 칼날을 손목에 더 깊이 댔다. 피부가 갈라졌다.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바닥이 지글거렸다. 피가 아스팔트를 태웠다.
"망나니 칼의 피로다."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김철호가 비명을 질렀다. 뒤로 넘어졌다.
검은 안개가 골목에 가득 찼다. 안개 속에서 저승사자가 나타났다.
"...선례가 없느니라."
저승사자가 장부를 펼쳤다. 페이지를 넘겼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컸다.
"망나니 칼의 주인이 제 피를 담보로 거래를 청한 적은."
한결이 칼을 더 깊이 눌렀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예린이 살려줘."
한결의 목소리가 낮았다.
"내 목숨 가져가도 돼. 대신 예린이는."
저승사자가 뒤로 물러났다. 처음 보는 행동이었다.
"그 피는..."
'안 되느니라!'
시우가 한결의 몸속에서 폭발했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네가 죽으면 나도— 나도—'
시우의 목소리가 끊겼다. 한결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그때였다.
저승문이 열렸다.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문 너머에서 손이 하나 뻗어 나왔다.
작고 여린 손.
아이의 손.
손목에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은색 체인. 하트 모양 장식.
한결이 본 적 있는 팔찌였다.
15년 전.
동생이 차고 있던.
"...오빠...?"
목소리가 들렸다. 여섯 살 아이의 목소리.
한결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쨍그랑. 금속음이 울렸다.
"...수아?"
한결의 입술이 떨렸다.
작은 손이 안개 속에서 더 나왔다. 팔이 보였다. 어깨가 보였다.
얼굴이 드러났다.
여섯 살 여자아이였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한결의 동생이었다.
15년 전 그날.
죽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오빠..."
수아가 웃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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