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조 수업, 라면 봉지가 비전서가 되다
주인공: 강민준
빗자루를 쥔 손이 떨렸다.
'왜 하필 지금.'
강민준은 마을 입구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화산파 소장문주님이시다!"
'미쳤나.'
민준은 빗자루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섰다. 다리가 굳었다. 어제 화련이 '사부님'이라 불렀던 게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그때는 그냥 넘어갔다. 화련이 혼자 착각한 거라고, 시간 지나면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장문주라니.
'소장문주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높은 사람인 건 확실하잖아.'
민준은 주막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장 사장이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민준아, 왜 거기 서 있어? 마당 청소 안 했냐?"
"아, 저기... 그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민준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장 사장은 뭐라 중얼거리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숨자. 화련이 날 못 찾으면 끝이야.'
민준은 빗자루를 벽에 기댄 뒤 주막 뒤편 골목으로 들어섰다. 좁은 길이었다. 양옆으로 쌓인 나무 상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여기서 한 시간만 버티면 돼. 그 사람 지나가면...'
그때였다.
"사부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숨이 멎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화련이 서 있었다. 흰색 도복 차림에 검을 차고, 눈빛은 어제보다 더 진지했다.
"어제 가르침을 더 주셔야죠."
"그, 그게..."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등이 나무 상자에 부딪혔다. 화련은 한 걸음 다가왔다.
"사부님, 피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
"어제 밤 사부님 말씀을 곱씹었습니다. '빗자루질도 수련이다.' 그 뜻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뭘 알아. 나도 모르는데.'
민준은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화련은 고개를 갸웃하며 민준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그건 뭡니까?"
"예?"
민준은 자신의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뭔가 삐져나와 있었다. 어젯밤 편의점 라면 봉지였다. 주머니에 구겨 넣어뒀던 게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아, 이건..."
말을 하려던 순간, 주머니가 찢어지며 라면 봉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화련이 몸을 숙였다.
"이게 뭐죠?"
"그냥... 쓰레기..."
화련은 라면 봉지를 집어 들었다. 빨간색 포장지에 한글이 빼곡했다. 화련은 봉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문자... 본 적 없는 형태입니다."
'당연하지. 한글인데.'
민준은 손을 뻗었다.
"그, 그거 주세요..."
"잠깐만요."
화련은 봉지 뒷면을 들여다봤다. 영양 성분표가 적혀 있었다. 나트륨 618mg, 단백질 9g, 탄수화물 72g...
"618..."
화련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 숫자... 내공 수치인가요?"
"예?"
민준은 멍하니 화련을 바라봤다. 화련은 봉지를 꼭 쥐며 고개를 들었다.
"사부님, 이건 비급 아닙니까?"
"아, 아니..."
"거짓말 마세요. 이 암호문... 평범한 게 아니에요."
'암호문?'
민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화련은 봉지를 펼치며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었다.
"618mg... 9g... 72g... 이 숫자들이 뭔가를 의미하는 거죠?"
"그게..."
민준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화련의 눈빛이 점점 더 진지해졌다.
"사부님, 제게 가르쳐주세요. 이 암호문의 비밀을."
'비밀? 무슨 비밀? 그냥 라면인데...'
민준은 목구멍이 타는 걸 느꼈다. 화련은 봉지를 민준에게 내밀었다.
"이게 고대 은둔 문파의 비전 암호문이죠?"
"...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문자를 쓸 리 없어요. 사부님,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민준은 화련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거짓말이라고 하면 믿을까? 아니, 믿을 리 없었다. 화련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지.'
민준은 라면 봉지를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이, 이건..."
"말씀하세요."
화련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민준은 뒷걸음질 쳤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건... 고대 은둔 문파의..."
'미친.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화련의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비전 암호문입니다."
화련의 눈이 커졌다.
"역시."
"하지만..."
"하지만요?"
"이건 아무한테도 보여주면 안 돼요."
민준은 봉지를 꼭 쥐며 목소리를 낮췄다. 화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비급은 함부로 공개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 그러니까..."
민준은 봉지를 화련에게 건넸다. 화련은 조심스럽게 봉지를 받아 들었다.
"사부님, 이 618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 Part 2/3: 전개
"618은..."
민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화련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빨리 말씀하세요."
'뭐라고 하지. 아무거나. 일단 아무거나 지어내.'
민준은 라면 봉지를 내려다봤다. 나트륨 618mg. 그 옆에 조그맣게 적힌 영양 성분표가 눈에 들어왔다.
"618은... 혈도입니다."
"혈도요?"
화련의 눈빛이 번쩍였다.
"인체의 618개 혈도를 뚫는 순서를 담은..."
"그럼 이 9는요?"
화련이 손가락으로 단백질 9g을 짚었다. 민준은 입술을 핥았다. 목이 바짝 말랐다.
"아홉 번의 운기조식."
"72는요?"
"칠십이 수... 아니, 칠십이 가지 자세."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나?'
민준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화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면 봉지를 꼭 껴안았다.
"역시... 이건 완전한 체계를 담은 비급이에요."
"그, 그런데..."
민준이 손을 뻗었다. 화련은 뒤로 물러섰다.
"사부님,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안 돼요."
"왜요?"
"그건... 위험해요."
민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화련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무슨 위험이요?"
"아무나 보면..."
"아무나 봐서는 안 되는 거죠?"
화련이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래서 사부님이 저한테 맡기시는 거예요. 제가 책임지고 수련하겠습니다."
"아, 아니..."
그때였다.
"화련아!"
주막 앞에서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 민준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화련은 고개를 돌렸다.
"진무혁 사형."
"여기 있었구나."
골목 입구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키 큰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회색 도복에 검을 찬 모습이었다. 얼굴은 단정했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저 사람이 소장문주?'
민준은 숨을 죽였다. 진무혁은 화련을 보다가 민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자는 누구냐?"
"그냥..."
화련이 말을 흐렸다. 진무혁은 민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행색이 초라한데."
민준은 고개를 숙였다. 진무혁의 시선이 무거웠다. 마치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주막 일꾼인가?"
"네, 네..."
민준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진무혁은 코웃음을 쳤다.
"화련, 너 이런 자랑 어울리냐?"
"사형, 이분은..."
화련이 라면 봉지를 등 뒤로 숨겼다. 진무혁은 그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뭘 숨기는 거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여줘."
진무혁이 손을 뻗었다. 화련은 뒤로 물러섰다. 민준은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살폈다.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진무혁은 화련의 손목을 붙잡았다.
"놓으세요."
"뭘 그렇게 감추냐?"
진무혁이 힘을 주었다. 화련은 손목이 비틀리며 라면 봉지를 놓쳤다. 봉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진무혁이 몸을 숙였다.
"이게 뭐냐?"
그가 라면 봉지를 집어 들었다. 민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끝났다.'
진무혁은 봉지를 펼쳤다. 눈살을 찌푸렸다.
"이 문자... 처음 보는데."
"사형, 그건..."
"고대 문자인가?"
진무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물건이에요."
"네 물건?"
"네."
진무혁은 화련을 빤히 쳐다봤다. 화련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민준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참았다.
'제발 그냥 넘어가.'
진무혁이 봉지를 돌려봤다. 뒷면의 영양 성분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618... 9... 72..."
그가 중얼거렸다. 민준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이 숫자들..."
진무혁의 눈빛이 변했다.
"혈도와 운기의 수치가 아니냐?"
'미친.'
민준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진무혁은 화련을 돌아봤다.
"화련, 너 어디서 이걸 구했냐?"
"그건..."
"말해."
진무혁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화련은 민준을 힐끗 봤다.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화련은 입을 열었다.
"저분이 주셨어요."
진무혁의 시선이 민준에게 꽂혔다.
"네가?"
"아, 아니..."
"거짓말 마라."
진무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민준은 뒷걸음질 쳤지만 벽에 막혔다.
"네가 화련에게 이걸 줬다는 거냐?"
"그, 그게 아니라..."
"그럼 뭐냐?"
진무혁이 라면 봉지를 민준 얼굴 앞에 들이댔다. 민준은 숨이 막혔다.
"이게 뭐냐?"
"그냥... 쓰레기..."
"쓰레기?"
진무혁이 비웃었다.
"쓰레기에 이런 암호를 새기나?"
"암호가 아니라..."
"그럼 뭐냐? 어서 말해."
진무혁의 손이 민준의 멱살을 잡았다. 민준은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사형, 그만하세요!"
화련이 진무혁의 팔을 붙잡았다. 진무혁은 화련을 밀쳤다.
"비켜."
"사형, 저분은 제 사부님이에요."
"뭐?"
진무혁의 손에 힘이 풀렸다.
# Part 3/3: 위기-클리프행어
진무혁의 손이 풀렸다.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목을 쓸어내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사부님?"
진무혁이 화련을 돌아봤다.
"너 지금 장난하냐?"
"아니에요."
화련은 민준 앞을 가로막았다.
"이분이 제게 비급을 전수해주셨어요."
"이 남루한 자가?"
진무혁이 민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민준은 고개를 더 숙였다.
'제발 그냥 가줘.'
"화련, 정신 차려라. 네가 속은 거다."
"속은 게 아니에요."
화련이 라면 봉지를 가리켰다.
"이 암호문을 보세요. 618개 혈도, 9회 운기조식, 72가지 자세..."
"그게 암호문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
진무혁이 봉지를 구겼다. 민준은 움찔했다.
"사형, 저 어제 이걸로 수련했어요."
"수련?"
"네. 618개 혈도를 순서대로 뚫었더니 내공이..."
화련이 손바닥을 펼쳤다. 희미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진무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믿으시겠어요?"
화련이 웃었다. 진무혁은 입을 다물었다. 민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내공이 늘었다고?'
민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라면 봉지로 진짜 수련이 된 건가. 말도 안 됐다.
"화련, 네가 뭘 잘못 본 거다."
진무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분명히 느꼈어요."
"우연이다."
"우연이 아니에요."
화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진무혁은 한숨을 쉬었다.
"좋다. 그럼 저 자에게 직접 물어보자."
진무혁이 민준을 내려다봤다.
"네가 화련의 사부라며?"
"아,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냐?"
진무혁이 쪼그려 앉았다. 민준과 눈높이가 맞춰졌다.
"증명해봐라."
"증명이요?"
"네가 고수라는 걸."
진무혁의 손이 민준의 어깨를 눌렀다. 순간 무게감이 밀려왔다. 민준은 숨이 막혔다.
"으윽..."
"내공이 있으면 버틸 수 있을 텐데."
진무혁이 비웃었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사형, 그만하세요!"
화련이 진무혁의 팔을 잡아챘다. 진무혁은 손을 거뒀다. 민준은 바닥에 쓰러졌다.
"봤지? 이 자는 평범한 일꾼이다."
"아니에요."
화련이 민준을 일으켰다.
"사부님은 내공을 숨기고 계세요."
"숨긴다고?"
진무혁이 코웃음 쳤다.
"그럼 왜 내 압박을 못 버텼냐?"
"그건..."
화련이 말을 잇지 못했다. 민준은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해.'
민준은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는..."
"뭐?"
진무혁이 귀를 기울였다.
"저는 무공을 모릅니다."
화련의 얼굴이 굳었다.
"사부님?"
"하지만..."
민준은 라면 봉지를 가리켰다.
"이건 진짜 비급이에요."
진무혁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공도 모르는 자가 비급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얻었어요."
"어디서?"
"그게..."
민준은 머릿속을 굴렸다.
"고대 유적에서."
'젠장. 말이 되나 이게.'
진무혁은 팔짱을 꼈다.
"고대 유적?"
"네. 산속에서 우연히..."
"어느 산?"
"그건..."
민준은 말을 흐렸다. 진무혁은 다가섰다.
"거짓말이지?"
"아니에요."
"그럼 증거를 대봐."
"증거는..."
그때였다.
주막 문이 벌컥 열렸다.
"나리들, 큰일 났습니다!"
장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얼굴이 새하얬다.
"왜 그러십니까?"
화련이 물었다. 장 사장은 숨을 헐떡이며 밖을 가리켰다.
"화산파 도복 입은 노인이 또 오는데요!"
진무혁의 얼굴이 굳었다.
"또?"
"네. 이번엔 장로님 같은데..."
"장로?"
진무혁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화련도 따라 나갔다. 민준은 주저앉은 채 그들을 바라봤다.
'장로? 뭐가 또 온다는 거야.'
민준은 라면 봉지를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민준은 벽에 등을 붙였다.
"진무혁, 네가 여기 있었구나."
낮고 굵은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민준은 숨을 죽였다.
"장로님."
진무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련도 여기 있나?"
"예."
"그래. 잘됐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민준은 라면 봉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 했다. 하지만 주머니는 이미 찢어져 있었다.
'어쩌지.'
민준은 봉지를 품에 안았다.
주막 문이 열렸다.
흰 수염의 노인이 들어섰다. 화산파 도복에 검을 찼다. 눈빛은 날카로웠고 주름은 깊었다.
노인은 민준을 봤다.
민준은 숨이 멎었다.
노인의 눈빛이 민준의 품으로 향했다.
라면 봉지가 삐져나와 있었다.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뭐냐?"
민준은 입술을 떨었다.
노인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 문자... 어디서 났느냐?"
민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노인의 손이 뻗어왔다.
그 순간, 화련이 노인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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