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봉지 즉석 강의: 사기꾼의 생존 프레젠테이션
주인공: 강민준
현무 장로의 손가락이 라면 봉지 위에서 멈췄다.
"이것은..."
목소리가 떨렸다. 팔십 평생 무림을 살아온 노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상고시대 문자다."
'뭐?'
민준의 등에서 땀이 솟았다. 라면 봉지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라면 매운맛. 농심. 유통기한 2024년 3월 15일.
이게 상고시대?
"장로님, 정말입니까?"
진무혁이 앞으로 나섰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이 자가 가진 물건이 고대 비급이라니..."
"닥쳐라."
현무 장로의 한마디에 진무혁이 입을 다물었다.
노인의 손가락이 '나트륨 618mg'을 짚었다. 그러고는 '칼로리 500kcal'로 옮겨갔다. 주름진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 문자들... 본 적이 있다."
'본 적이 있다고?'
민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목구멍이 바싹 말랐다.
'어떻게 본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 이거 그냥 영양성분표라니까요.'
"사십 년 전, 종남산 고분에서 발굴된 죽간에 이와 유사한 기호가 있었다."
현무 장로가 라면 봉지를 들어올렸다. 햇빛에 비춰진 은박지가 반짝였다.
"당시 문파 연합으로 해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지. 하지만 이것은..."
노인의 눈이 빛났다.
"완전한 형태다."
화련이 벌떡 일어났다.
"사부님! 그럼 이 비급을 해독하실 수 있으신 겁니까?"
"...시도는 해볼 수 있다."
현무 장로가 민준을 돌아봤다. 시선이 꽂혔다.
"이것을 어디서 구했느냐."
"그, 그게..."
민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노인의 눈이 따라왔다.
'어쩌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편의점에서 샀다고? 3,500원 주고?
말이 안 나왔다.
"대답하거라."
"저, 저기..."
"이봐!"
진무혁이 민준의 멱살을 잡았다. 앞으로 확 끌려갔다.
"어디서 훔쳤느냐? 아니면 누구를 죽이고 빼앗았느냐?"
"아, 아니..."
"그럼 뭐냐!"
"진무혁."
화련이 진무혁의 팔을 잡았다.
"놔. 사부님께서 심문하신다."
"하지만 사매..."
"놔라고 했다."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진무혁이 민준을 밀쳤다. 민준이 뒤로 휘청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민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러다 죽겠네.'
손발이 떨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현무 장로가 천천히 다가왔다.
"두려워 말거라. 진실만 말하면 된다."
"..."
"이것을 누구에게 받았느냐."
'받긴 뭘 받아요.'
민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편의점에서 샀다는 건 100% 안 믿어. 그럼 뭐라고 해야...'
"스승님께... 받았습니다."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스승?"
현무 장로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 돌아가시기 전에... 이것만 남기셨습니다."
'미안 부모님. 이러다 살아남으면 제사 두 번 지낼게요.'
"흠."
현무 장로가 턱을 쓰다듬었다.
"스승의 이름은?"
"그건..."
민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이것을 지키라고만..."
목소리를 떨리게 만들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진짜로 떨렸다.
화련이 눈물을 글썽였다.
"사부님... 이 분도 저와 같은 처지시네요."
"화련아."
"스승님을 잃고 홀로 떠도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아니 왜 혼자 감동하고 그래요.'
민준이 화련을 힐끗 봤다. 눈가가 정말 젖어 있었다.
진무혁이 코웃음을 쳤다.
"사매는 너무 순진해. 저자의 말을 어찌 믿는가."
"오빠는 너무 의심이 많아."
"의심이 아니라 당연한..."
"됐다."
현무 장로가 손을 들었다.
"일단 이 비급부터 살펴보자. 진위는 그 다음 문제다."
노인이 라면 봉지를 펼쳤다. 뒷면의 영양성분표가 드러났다.
"여기 보거라."
손가락이 '나트륨 618mg'을 가리켰다.
"이 숫자의 배열... 우연이 아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장로님?"
화련이 눈을 빛냈다.
"6과 18. 육합()과 십팔반무예()..."
'아 제발.'
민준이 속으로 신음했다.
'그냥 나트륨 함량이라니까요. 짜다고요. 짜.'
"그리고 이 'mg'라는 기호..."
현무 장로가 중얼거렸다.
"무극()의 기(기)를 뜻하는 것일까."
"대단합니다, 사부님!"
화련이 무릎을 쳤다.
"역시 사부님이시라면 해독하실 수 있으실 줄 알았습니다!"
"아직 확실치 않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것이 범상치 않은 물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진무혁이 민준을 노려봤다.
"장로님,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시는 게..."
"그러지."
현무 장로가 민준을 향했다.
"네 스승께서 이것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망했다.'
민준의 등이 축축해졌다.
"그, 그게..."
"천천히 말해도 좋다."
노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민준의 입이 바싹 말랐다. 목구멍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뭐라고 하지.'
현무 장로의 눈빛이 깊어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응?"
"이것은... 단순한 비급이 아니라..."
민준의 시선이 라면 봉지로 향했다. 나트륨 618mg. 칼로리 500kcal. 포화지방 13g.
'게임에서 봤던 거... 스탯창이랑 비슷하잖아.'
"수련자의 상태를 수치로 기록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수치로?"
현무 장로가 앞으로 다가왔다.
"계속 말해보거라."
"네. 이 나트륨이라는 건..."
민준이 손가락을 떨며 가리켰다.
"체내 탁기의 농도를 뜻합니다."
"탁기의 농도..."
노인이 중얼거렸다.
"618이라는 숫자는 탁기가 육백십팔 단위만큼 쌓여 있다는..."
"맞습니다!"
'아 이게 먹혀?'
민준의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이 칼로리는..."
"잠깐."
진무혁이 끼어들었다.
"탁기가 쌓여 있다면 해로운 것 아닌가? 왜 이것을 비급에 기록하는가?"
'망했다.'
민준의 입술이 떨렸다.
"그, 그건..."
"대답 못 하는구나."
진무혁이 비웃었다.
"역시 거짓말..."
"아닙니다!"
화련이 벌떡 일어났다.
"오빠는 왜 자꾸 방해해요?"
"사매, 정신 차려. 저자는 분명..."
"사부님께서 듣고 계시잖아요. 조용히 해요."
화련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진무혁이 입을 다물었다.
현무 장로가 손을 들었다.
"화련의 말이 맞다. 계속 들어보자."
노인이 민준을 봤다.
"탁기가 쌓인 이유를 설명하거라."
"예..."
민준이 라면 봉지를 받아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일단 뭐라도 지어내자.'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탁기는... 나쁜 게 아니라고..."
"응?"
"정화하기 전 상태를 기록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 비급은... 수련 전과 후를 비교하기 위한..."
"아!"
현무 장로가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수련 일지였던 것이냐!"
'뭐?'
민준이 눈을 깜빡였다.
"고대 수련자들이 자신의 상태를 수치로 기록하고, 정화 과정을 거쳐 변화를 확인했다..."
노인의 눈이 반짝였다.
"대단한 발상이다!"
화련이 박수를 쳤다.
"역시 사부님! 한 번에 이해하시다니!"
"아니다. 이 청년의 스승이 대단한 것이지."
현무 장로가 민준을 봤다. 눈빛이 달라졌다.
"네 스승은... 어느 문파였느냐?"
"저, 저기..."
"말하기 어렵다면 괜찮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은둔 고수였을 게다. 이런 비급을 가진 자라면..."
진무혁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말은 안 했다.
현무 장로가 다시 라면 봉지를 펼쳤다.
"그렇다면 이 칼로리는..."
"내공의 총량입니다."
민준이 급히 말했다.
"500이라는 건... 오백 단위의 내공이 체내에 있다는..."
"잠깐만."
진무혁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럼 이 포화지방 13g은 뭔가?"
'아 진짜.'
민준이 진무혁을 노려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건..."
"대답 못 하지?"
진무혁이 비웃었다.
"역시 지어낸 거야. 장로님, 이자는..."
"포화지방은 정화되지 않은 내공입니다."
민준이 외쳤다.
"..."
"탁기가 섞인 내공이요. 그래서 포화... 아니, 포악한 지방...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말이 되나 이게.'
민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현무 장로가 턱을 쓰다듬었다.
"포악한 기운..."
"네. 그래서 13g... 십삼 단위만큼은 정화가 필요하다는..."
"흠."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구나."
'진짜요?'
민준이 눈을 크게 떴다.
"탁기가 섞인 내공을 그대로 두면 주화입마에 빠진다. 당연히 정화해야지."
현무 장로가 라면 봉지를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이 비급의 핵심은..."
"정화 방법입니다."
민준이 손가락을 떨며 가리켰다.
"여기 보시면... 물 250ml를 함께 섭취하라고..."
"물?"
"네. 이백오십... 아니, 250이라는 숫자는 물의 양을 뜻합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 이거 그럴싸한데?'
"ml는 아마... 맑을 명(명)자와 물 수(수)자를 합친..."
"천재로구나!"
현무 장로가 외쳤다.
"물로 탁기를 씻어낸다! 수화상생(수화생)의 원리가 아닌가!"
화련이 눈물을 글썽였다.
"사부님... 이 비급은 정말..."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노인이 민준의 어깨를 잡았다.
"네 스승은 진정한 고수였구나."
민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합니다 농심.'
"그런데 한 가지 더 묻겠다."
현무 장로가 라면 봉지 앞면을 가리켰다.
"이 그림은 무엇이냐?"
빨간 국물에 면이 담긴 사진이었다. 고춧가루가 둥둥 떠 있었다.
"이건..."
민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수련 후 도달하는 경지를 그린 겁니다."
"경지?"
"네. 붉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민준이 라면 사진을 손으로 쓸었다.
민준의 손끝이 라면 사진 위를 더듬었다.
"면발 하나하나가... 경맥입니다."
"경맥?"
현무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붉은 기운이 경맥을 타고 흐르면..."
"대주천이로구나!"
노인이 무릎을 쳤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온몸이 불처럼 뜨거워진다는..."
'아 몰라. 그냥 가자.'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뻣뻣했다.
화련이 라면 봉지를 들여다봤다.
"그럼 이 하얀 가루는요?"
손가락이 건더기 스프 사진을 가리켰다.
"저건..."
민준의 입술이 말랐다.
"정화된 내공의 결정입니다."
"결정?"
"네. 탁기를 완전히 제거하면 이런 순백의..."
"대단해!"
화련이 눈을 빛냈다.
"사부님, 이 비급 정말..."
쾅!
대문이 거칠게 열렸다.
"장로님!"
장 사장이 뛰어 들어왔다. 얼굴이 새하얬다.
"마, 마교 무사들이..."
"알고 있다."
현무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명이냐."
"최소 열..."
"겨우 열이면 걱정 없다."
노인이 허리춤의 검을 만졌다.
진무혁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아니다. 화련, 네가 가거라."
"예, 사부님."
화련이 검을 들었다. 눈빛이 차가워졌다.
'뭐야 저 표정.'
민준이 뒤로 물러섰다. 아까 그 순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진무혁은 여기 남아라."
"하지만..."
"이자를 지켜야 한다."
현무 장로가 민준을 봤다.
"마교놈들이 이 비급을 노리고 온 것일 수도 있다."
'예?'
민준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그럴 리가..."
"종남산 고분에서 나온 물건이라 했지?"
노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마교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게다."
'아니 그냥 편의점에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꿀꺽 삼켰다.
화련이 밖으로 나갔다. 검을 빼는 소리가 들렸다.
"장 사장."
"예, 예!"
"주민들을 지하로 대피시켜라."
"알겠습니다!"
장 사장이 뛰어나갔다. 밖에서 비명이 터졌다.
민준이 벽 쪽으로 붙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망쳐야 하나.'
진무혁이 문 앞을 막아섰다.
"움직이지 마라."
"저, 저기... 화장실..."
"안 된다."
"진짜 급한데요..."
"닥쳐."
진무혁의 손이 검자루로 갔다.
창문 너머로 불빛이 번쩍였다. 검광이었다.
"으아아!"
비명과 함께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민준이 벽에 등을 붙였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이거 진짜 죽는 거 아냐.'
현무 장로가 라면 봉지를 집어들었다.
"이것을 품에 넣어라."
"예?"
"마교놈들이 빼앗으려 들 것이다."
노인이 민준의 손에 라면 봉지를 쥐어줬다.
"목숨 걸고 지켜라."
'왜 제가요!'
민준이 라면 봉지를 떨며 받았다.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쾅!
옆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크큭..."
낮고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화산파 계집애 하나가 이리 날뛰는구나."
"누구냐!"
화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지 않았다.
"혈마신교 좌호법 마천룡이다."
"좌호법?"
현무 장로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장로님?"
진무혁이 돌아봤다.
"좌호법이면 화련 혼자서는..."
"내가 간다."
노인이 검을 뽑았다.
"진무혁, 이자를 절대 놓치지 마라."
"예!"
현무 장로가 창문을 박차고 나갔다. 기와가 우르르 무너졌다.
민준과 진무혁만 남았다.
"..."
"..."
둘이 눈이 마주쳤다. 민준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진무혁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우리밖에 없군."
"예, 예..."
"솔직히 말해라."
검을 빼는 소리가 났다.
"그 비급, 진짜냐?"
민준이 뒤로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았다.
"진, 진짜예요..."
"거짓말."
진무혁의 검끝이 민준의 목을 향했다.
"네놈 같은 겁쟁이가 고수의 제자일 리 없어."
"저, 저기..."
"마지막 기회다. 어디서 훔쳤지?"
검끝이 목에 닿았다. 차가웠다.
민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거 진짜 찌르는 거 아냐?'
밖에서 폭음이 터졌다. 건물이 흔들렸다.
"으윽!"
화련의 신음이 들렸다.
진무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매..."
검끝이 흔들렸다. 잠깐이었다.
민준이 옆으로 굴렀다. 검이 벽을 파고들었다.
"이놈!"
진무혁이 검을 빼냈다.
민준이 문 쪽으로 기어갔다. 라면 봉지를 꽉 쥐었다.
"어딜!"
뒤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민준이 고개를 숙였다. 검이 머리 위를 스쳤다.
"으악!"
바닥을 굴러 밖으로 나왔다.
광장이 아수라장이었다.
화련이 피를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맞은편에 검은 옷의 사내가 서 있었다.
마천룡.
얼굴에 흉터가 가득했다.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이게 화산파의 실력이냐?"
"닥쳐!"
화련이 검을 날렸다. 검광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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