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따의 무림 사기극: 가짜 고수 진짜 되기
주인공: 강민준
눈을 뜨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천장이 없었다. 형광등 대신 나뭇가지가 보였다. 지하철 특유의 쾌쾌한 냄새 대신 흙내음이 코를 찔렀다.
"...뭐지?"
민준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양복 바지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은 온데간데없었다.
대나무 숲이었다. 사방이 죄다 대나무.
'촬영장?'
그래, 그럴 거다. 회사 근처에서 사극 찍는다고 통제한다던데. 졸다가 지나쳐서 내렸나? 근데 여기가 어디지?
바람이 불었다. 대나무가 흔들리며 바스락거렸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기... 혹시..."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사람 있어요? 스태프분?"
대답은 없었다. 새소리만 들렸다.
'아 진짜, 이거 뭐야.'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 카드, 신분증. 전부 그대로였다. 근데 핸드폰만 없었다.
"미친..."
그때였다.
우르릉.
뭔가 무거운 게 땅을 밟는 소리. 가까웠다.
민준은 얼어붙었다.
대나무 사이로 뭔가 나타났다. 주황색 털가죽. 검은 줄무늬.
호랑이였다.
"...거짓말이지?"
호랑이는 민준을 똑바로 쳐다봤다. 노란 눈동자가 빛났다.
"아악!"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 달렸다.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따라왔다.
'죽는다 죽어!'
대나무를 휘어잡고 미친 듯이 달렸다. 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아팠다. 진짜로 아팠다.
'이게 왜 이렇게 리얼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가 풀렸다. 민준은 비틀거리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으윽..."
뒤를 돌아봤다.
호랑이는 없었다.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민준은 바닥에 엎드린 채 헥헥거렸다.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마을이 보였다.
한옥이었다. 기와지붕, 한자 간판, 흙길. 사람들은 한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민준은 멍하니 서서 광경을 바라봤다.
'진짜 촬영장이네.'
안도감이 밀려왔다. 괜찮아. 스태프한테 사정 얘기하면 돼. 길 잃었다고, 핸드폰 없다고.
그런데.
지나가던 남자가 민준을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저게 뭔 꼴이람."
"...예?"
남자는 대꾸도 안 하고 지나갔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진짜 칼이었다. 소품 같은데 묘하게 날이 서 보였다.
'...잠깐.'
민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카메라가 없었다. 조명도, 붐 마이크도, 감독도.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저기... 실례지만..."
지나가던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는 민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거지냐?"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가 어디..."
"쯧."
아주머니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이상해. 뭔가 진짜 이상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언제 먹었더라? 점심? 아침?
기억이 안 났다.
주막이 보였다. '취선루'라는 한자 간판이 걸려 있었다.
민준은 주막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들어갈까? 근데 돈이...
지갑을 꺼냈다. 만 원짜리 몇 장. 카드.
'...이거 여기서 먹힐 리가 없잖아.'
그래도 배는 고팠다. 민준은 용기를 내서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죄송한데요..."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민준을 쳐다봤다. 뚱뚱한 체구에 수염이 덥수룩했다.
"뭐?"
"그게... 일 좀 시켜주실 수 있으세요? 밥이라도..."
주인은 코웃음을 쳤다.
"일? 너 같은 약골이 뭘 하게?"
"설거지라도, 청소라도..."
"에이,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요. 진짜 배고파서..."
"나가라니까!"
주인이 손을 휘저었다. 민준은 움찔하며 뒷걸음질쳤다.
밖으로 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골목으로 들어갔다. 쓰레기통이 보였다.
민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쓰레기통 뚜껑을 열었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역질이 났다.
그래도 뒤졌다.
만두가 있었다. 반쯤 먹다 버린 것. 까맣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이걸 먹어야 하나?'
배에서 또 소리가 났다.
민준은 만두를 집어 들었다. 곰팡이 핀 부분을 떼어내고 한입 베어 물었다.
"으으..."
맛이 없었다. 아니, 역겨웠다. 그래도 삼켰다.
두 입, 세 입.
뭔가 이상했다. 속이 뒤틀렸다.
"윽..."
민준은 쓰레기통을 붙잡고 토했다. 방금 먹은 만두가 전부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진짜 끝이네.'
배가 아팠다.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 Part 2/3: 전개
얼굴에 물이 튀었다.
"일어나."
누군가 민준의 뺨을 톡톡 쳤다. 차가운 손길이었다.
"...으."
민준은 눈을 떴다. 시야가 흐렸다. 누군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였다.
검은 옷. 허리춤에 찬 검. 묶어 올린 머리.
"...누구?"
"네가 먼저 대답해. 왜 여기 쓰러져 있어?"
화련이었다. 민준은 나중에 그 이름을 알게 되지만, 지금은 그저 무서웠다.
"저, 저기... 배가 아파서..."
"상한 음식을 먹었구나."
화련은 민준의 입가를 살폈다. 토사물 흔적이 남아 있었다.
"쓰레기통 뒤진 거냐?"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해?"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습관이었다.
화련은 한숨을 쉬더니 품에서 뭔가 꺼냈다. 작은 병이었다.
"마셔."
"이게 뭔데요?"
"해독환이야. 독은 아니니까 안심해."
민준은 병을 받아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마개를 열었다. 쓴 냄새가 났다.
'이거 진짜 먹어도 되나?'
그런데 선택지가 없었다. 배는 여전히 아팠고, 이 여자는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민준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삼켰다.
"으윽..."
"물."
화련이 물주머니를 던졌다. 민준은 받아서 벌컥벌컥 마셨다.
신기했다. 뱃속이 따뜻해지더니 통증이 가라앉았다.
"...진짜네."
"당연하지. 화산파 영약인데."
화산파?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화산파요? 그게... 진짜 있어요?"
화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너 어디서 왔어?"
"그게..."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지하철 타다가 여기 왔다고? 미친놈 취급받겠지.
"말 안 할 거면 됐어. 근데 여기서 자면 죽어."
화련은 일어섰다.
"일어나. 주막까지 데려다줄게."
"아, 거기는..."
민준은 주막 주인 얼굴을 떠올렸다. 또 쫓겨날 게 뻔했다.
"싫으면 여기 있어."
화련이 돌아섰다.
"저, 잠깐만요!"
민준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화련은 한숨을 쉬더니 민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고맙습니다."
"됐어. 무겁게 굴지 마."
***
취선루.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민준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너 또 왔어? 나가라니까."
"장 사장."
화련이 끼어들었다.
"이 사람 재워줘."
"뭐? 화련 아가씨, 이 거지를..."
"재워주면 은자 다섯 냥 줄게."
주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방은 좁은데."
"상관없어."
화련은 은자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주인은 재빨리 낚아챘다.
"알았어요. 근데 밥값은 따로..."
"같이 쳐."
은자가 하나 더 추가됐다.
민준은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저기... 왜 이렇게까지..."
"앉아."
화련이 자리를 가리켰다. 민준은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주인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민준 앞에는 밥과 국이 놓였다.
"먹어."
"...감사합니다."
민준은 숟가락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밥을 한 술 뜨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친... 이게 뭐라고.'
화련은 술잔을 기울이며 민준을 지켜봤다.
"천천히 먹어. 체해."
"네..."
민준은 국을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다. 진짜 따뜻했다.
'꿈이면 깨지 마.'
밥을 다 먹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왔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궁금해?"
"네..."
화련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네 눈빛이 달랐어."
"눈빛이요?"
"응. 죽을 것 같으면서도 포기 안 한 눈. 그런 눈 가진 사람은 오래 살아."
민준은 고개를 숙였다.
'포기 안 한 게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건데...'
"그리고."
화련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너 무공 배운 적 있어?"
민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아니요, 전혀..."
"거짓말."
"진짜예요!"
화련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아까 네 경혈을 봤어. 기혈이 막혀 있더라."
"기혈이요?"
"보통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기혈이 열려 있어. 근데 너는 인위적으로 막은 흔적이 있어."
민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몰랐다.
"혹시... 은둔 문파 출신이야?"
"은둔 문파요?"
화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문파. 제자들에게 기혈을 봉인해서 속세에 내보내는 곳도 있어."
'뭔 소리야 대체.'
민준은 손을 저었다.
"아니, 저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냥?"
"...회사원이요."
화련은 눈을 가늘게 떴다.
"회사원? 그게 뭐야?"
"아, 그게..."
민준은 말을 멈췄다. 설명할 수가 없었다.
화련은 한참 민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숨기고 싶으면 숨겨. 대신."
# Part 3/3: 위기-클리프행어
"대신?"
민준은 침을 삼켰다.
화련이 검을 빼들었다.
"이거 막아봐."
"네?!"
검이 날아왔다. 진짜로.
민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의자가 넘어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움직임이 이상해."
화련이 다가왔다. 검끝이 민준의 목을 향했다.
"일반인이라면 저렇게 못 피해."
"저, 정말 아무것도 안 배웠어요!"
민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화련은 검을 거뒀다.
"...진심이네."
"진심이라니까요!"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미친. 진짜 죽는 줄.'
화련은 한참 민준을 내려다보다 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놈."
"...예?"
"기혈은 막혀 있는데 반사신경은 살아 있어. 무공은 모르는데 위기 감지는 돼."
화련이 턱을 괴었다.
"너 정체가 뭐야?"
민준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지하철 타다가 여기 왔어요? 핸드폰 하다가 정신 차리니 숲이었어요?'
말이 안 됐다. 자기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다.
"모르겠으면 됐어."
화련이 일어섰다.
"내일 아침 여기서 나가. 은자는 하룻밤 값이야."
"저, 잠깐만요."
민준이 화련의 옷자락을 잡았다. 화련이 돌아봤다.
"...왜?"
"저 진짜 갈 데가 없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화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발요. 일 시켜주세요. 뭐든 할게요."
"..."
"설거지, 청소, 심부름, 진짜 뭐든..."
"됐어."
화련이 민준의 손을 뿌리쳤다.
"나한테 매달리지 마. 나도 바빠."
"그럼 어떡해요!"
민준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막 안 사람들이 쳐다봤다.
화련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시끄러워."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화련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민준은 그대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주막 주인이 혀를 찼다.
"쯧. 방은 저쪽 끝이야. 내일 아침 되기 전에 나가."
***
방은 좁았다. 이불도 없었다. 그냥 멍석 하나 깔린 방바닥.
민준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어떡하지.'
내일이 되면? 쫓겨나면?
또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나. 또 탁한 물을 마셔야 하나.
'집에 가고 싶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참았다.
'울면 뭐가 달라져? 아무것도 안 달라져.'
민준은 무릎을 꼭 껴안았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화련 아가씨!"
주막 주인의 목소리였다.
민준은 귀를 기울였다.
"왜요?"
"아까 그 놈 말인데요. 진짜 은둔 문파 출신 맞아요?"
"...모르겠어요."
"에이, 숨기지 마시고. 아가씨가 은자까지 쓰면서 챙기는 거 보니까 범상치 않은 거 아니에요?"
"그냥 불쌍해 보여서 그랬어요."
"불쌍하긴요. 눈빛이 예사롭지 않던데."
민준은 벽에 귀를 바짝 댔다.
"장 사장. 그 사람한테 함부로 하지 마세요."
"...왜요?"
"기혈이 막혀 있어요. 인위적으로."
"그게 무슨..."
"봉인이에요. 아마 어떤 이유로 힘을 숨기고 있는 거예요."
주인이 헛기침을 했다.
"그, 그럼 진짜 고수란 말이에요?"
"확신은 못 해요. 근데 조심하는 게 좋아요."
발소리가 멀어졌다.
민준은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봉인? 고수?'
말도 안 됐다. 자기는 그냥 회사 다니다가 여기 떨어진 것뿐인데.
'근데 왜 호랑이가 안 물어뜯었지?'
그 생각이 퍼뜩 들었다.
분명 죽을 뻔했다. 호랑이 눈을 봤다. 이빨도 봤다.
근데 물지 않았다.
'왜?'
민준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평범한 손이었다. 굳은살도 없고, 상처도 없고.
'내가 뭔가 특별하다고?'
웃겼다.
민준은 멍석에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나무 서까래가 삐걱거렸다.
'일단 자자. 내일 생각은 내일.'
눈을 감았다.
잠이 안 왔다.
***
아침이 밝았다.
민준은 주막 밖으로 나왔다. 주인이 빗자루를 던졌다.
"쓸고 가."
"...네?"
"어젯밤 은자 받은 거 아까워서 그래. 마당이나 쓸고 나가."
민준은 빗자루를 받았다. 선택지가 없었다.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낙엽이 수북했다. 먼지가 날렸다.
'이것도 일이긴 하네.'
30분쯤 지났을까.
마을 입구 쪽에서 소란이 들렸다.
"비켜라! 비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민준은 빗자루를 든 채 멈춰 섰다.
한 무리가 지나갔다. 검을 찬 사람들. 화려한 옷.
그 가운데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얼굴은 조각 같았다.
"화산파 소장문주님이시다!"
누군가 외쳤다.
민준은 그 남자를 봤다. 남자도 민준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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