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소리의 주인
주인공: 강도혁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발이 먼저 미끄러졌다.
"유진아!"
목소리가 지하 공간의 벽을 때리고 흩어지는 순간, 어둠 속에서 총성이 터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뭔가 쓰러지는 무게감이 바닥을 울렸다.
도혁의 눈이 그림자를 훑었다. 도윤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 새끼, 죽었나.'
그런데 쓰러진 몸이 조명 아래로 굴러 나왔을 때,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민재였다.
"민재야?"
유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총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춘 채였다.
도윤은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총구는 여전히 그쪽을 향해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도혁은 무릎을 꿇고 민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바닥에 뜨끈한 것이 번져왔다.
"야, 이 새끼야, 눈 떠."
민재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숨소리가 젖은 종이 넘기는 소리 같았다.
"쉬발, 하필 이런 데서."
도혁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이빨로 물어 뜯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지하실 전체를 채웠다.
"감정은 방해될 뿐이에요."
유진이 무릎을 꿇으며 손을 뻗었다. 목소리는 차가웠는데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손 대."
"거기 그렇게 잡으면 지혈 안 돼요. 이쪽으로."
둘의 손이 상처 위에서 겹쳤다. 순간 서로의 손끝이 스쳤고, 정적이 짧게 내려앉았다.
도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딴생각 할 시간 없어. 묶어."
천을 두 사람이 함께 조이는 동안 민재의 숨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눈빛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버틸 수 있을까.'
도혁은 민재의 뺨을 툭툭 쳤다.
"인마, 정신 차려. 여기서 뻗으면 예의 아니잖아."
"...도혁이 형."
민재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나왔다.
"형이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몰랐겠지. 니가 유진이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 모르니까."
도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겉으로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민재가 웃었다. 피 섞인 웃음이었다.
"전화, 그거 내가 걸었어."
지하 공간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도혁의 손이 멈췄다.
"뭐?"
"형 번호로. 유진이한테. 그날."
민재의 눈이 허공을 응시했다. 초점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다시 또렷해졌다.
"내가 그랬어. 도혁이 형 목소리로."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목소리는... 흉내 내는 게 어렵지 않아. 조금만 연습하면."
도혁은 민재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왜."
"..."
"왜 그랬냐고, 이 새끼야."
민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 순간, 눈빛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그게... 그래야 다들 알아듣지 않겠어."
말투가 변했다. 느릿하고 낮은, 도혁이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 톤, 어디서 들었더라.'
등줄기에 소름이 스쳐 지나갔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민재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강도혁, 너도 알잖아. 목소리는 얼마든지 빌릴 수 있다는 거."
도혁의 눈이 커졌다. 저 말투는 철민의 것이었다.
"이 새끼 지금 누구 흉내 내는 거야."
말이 반말로 툭 떨어졌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민재의 옷깃이 더 세게 조여졌다.
"야, 장난하냐? 지금 이 상황에서?"
유진이 도혁의 팔을 붙잡았다.
"도혁 씨, 진정해요. 지금 그럴 때가."
"놔."
"민재 죽어가고 있어요. 지금 흔들면 아무것도 못 들어요."
도혁의 숨이 거칠어졌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서는 것이 유진의 눈에도 보였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억지로 손을 풀었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민재가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엔 원래 목소리로 돌아온 듯했다.
"형, 나도 다 알고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누가 시켰는데."
"..."
"누가 시켰냐고."
민재의 눈이 도윤 쪽을 향했다. 도윤은 여전히 총을 든 채 미동도 없었다.
"저 사람... 도윤이... 아니, 아니다."
민재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철민이가... 아니, 도혁이 형이..."
이름들이 뒤섞이고 있었다. 도혁과 도윤과 철민, 세 개의 이름이 민재의 입에서 순서 없이 튀어나왔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도혁이 다시 민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목소리에 인내심이 빠르게 갈려나가고 있었다.
"똑바로 말해. 누가 니한테 그 목소리 쓰라고 시켰냐고."
민재의 입술이 떨렸다. 숨소리가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계속 살아있었어. 십 년 전부터."
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라고?"
"세 명이 죽은 게 아니라... 두 명만..."
민재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눈이 감기려는 걸 억지로 뜨고 있는 것 같았다.
도혁은 민재의 얼굴을 붙잡았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점점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야, 끝까지 말해. 지금 그만두면 어떡해."
"형, 미안해."
"미안할 시간에 말이나 해!"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이제는 완전히 반말로 굳어져 있었다.
민재의 눈동자가 도혁을 응시했다. 그러다 시선이 흐려지며 천장 어딘가를 향했다.
"...윤재."
낯선 이름이 튀어나왔다.
도혁도 유진도 그 이름을 몰랐다.
"뭐? 윤재가 누구야?"
대답은 없었다.
민재의 눈에서 초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고개가 옆으로 툭 꺾였다.
지하실 조명이 갑자기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도혁이 고개를 들어 벽을 보았다. 낡은 녹음 장비 하나가 저절로 붉은 불빛을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치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도혁이 넌."
도혁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목소리는 죽은 강태산의 것이었다.
목소리가 잦아든 뒤에도 잡음은 계속 흘렀다. 치이익, 치이익.
도혁의 다리가 그대로 풀렸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아버지가... 왜 지금."
유진이 녹음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붉은 불빛이 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저건 그냥 재생 장치예요. 누군가 미리 심어놓은 거."
"누가."
"모르죠. 하지만 이 타이밍에 저절로 켜질 리는 없잖아요."
도혁의 손이 민재의 시신에서 떨어졌다. 손바닥에 굳어가는 피가 이제는 완전히 차가웠다.
'죽었다. 진짜로 죽었어.'
숨소리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녹음기의 잡음만 계속됐다. 도혁은 그 소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벽을 더듬었다. 낡은 콘크리트 틈 사이로 전선 하나가 삐죽 나와 있었다.
"철민이 설계한 거예요."
유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 안가 전체가 철민 씨 손을 거쳤어요. 목소리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시스템, 다 여기서 나온 거고."
도혁이 전선을 잡아당겼다. 뜯겨나간 자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럼 아버지 목소리도 저 새끼가 만든 거란 소리야?"
"만든 건지 진짜 저장된 건지는 몰라요."
유진이 민재의 시신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눈을 감겨주려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민재가 죽기 전에 한 말, 기억나요?"
"윤재."
"그리고 세 명이 아니라 두 명만 죽었다고."
도혁의 시선이 벽에서 유진에게로 옮겨갔다.
"그 말을 믿어?"
"믿고 싶지 않죠. 근데 죽어가는 사람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다. 도윤은 여전히 벽 쪽에서 총을 든 채였다. 그 손끝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도 몰랐어."
도윤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
"그 사건, 나도 세 명 다 죽은 걸로 알고 있었다고."
도혁의 눈이 도윤에게 꽂혔다.
"넌 뭘 알고 있는데."
"몰라. 진짜 모른다니까."
"그럼 니가 여기 왜 있어."
도혁의 걸음이 도윤을 향해 옮겨졌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가 좁혀질수록 도윤의 총구가 위로 들렸다.
"거기서 멈춰."
"멈추라고 하면 멈출 것 같아?"
"강도혁, 나 지금 진심이야."
도혁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순간 반말이 툭 튀어나왔다.
"너도 그 목소리 놀이에 낀 거 아니야? 민재처럼."
"아니라니까!"
도윤의 목소리가 커졌다. 손가락이 방아쇠 위에서 미끄러졌다.
유진이 다급히 두 사람 사이로 몸을 밀어넣었다.
"둘 다 그만해요! 지금 서로 죽여서 얻는 게 뭐예요!"
"비켜, 유진아."
"안 비켜요. 지금 진짜 필요한 건 저 이름이 누군지 알아내는 거예요. 윤재가 누구인지."
도혁의 숨이 거칠게 몰아쳤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다시 도드라졌다.
"그래서, 그 이름 어디서 찾을 건데. 이 지하실 어디에."
유진의 시선이 방 안 구석으로 향했다. 낡은 서류함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저기요. 철민 씨가 남긴 서류들, 저 안에 있을지도 몰라요."
도혁이 성큼 걸어가 서류함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열쇠 없어?"
"없어요. 근데."
유진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혁의 발이 서류함을 걷어찼다. 쾅.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튀어나왔다.
"그게 예의는 아니지만, 지금 예의 차릴 때는 아니니까."
서류함 안에는 낡은 파일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도혁의 손이 하나씩 뒤지기 시작했다.
"윤재, 윤재..."
손끝이 멈춘 곳은 색이 다 바랜 봉투 하나였다. 겉면에 적힌 이름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찾았다."
봉투를 뜯는 손이 떨렸다. 안에서 나온 건 낡은 사진 한 장과 신상 기록이었다.
사진 속 얼굴을 확인한 순간, 도혁의 눈이 커졌다.
"이거... 이 얼굴, 어디서 봤는데."
유진이 옆으로 다가와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 순간 유진의 안색이 종이처럼 하얘졌다.
"이 사람... 설마."
말을 잇지 못했다. 도윤도 총을 내린 채 그쪽으로 걸어왔다.
바로 그때, 지하실 위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규칙적이고 빠른, 조직 특유의 움직임.
도혁의 몸이 순간 굳었다.
"누구야, 지금 이 시간에."
계단 위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도혁,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도혁의 눈이 사진에서 계단으로 튕기듯 옮겨갔다.
'저 목소리, 어디서 들었는데.'
기억을 더듬을 새도 없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하나, 둘, 셋, 최소 넷 이상의 인원이었다.
"유진아, 뒤로 빠져."
"도혁 씨."
"빠지라고."
낮게 깔린 명령에 유진이 서류를 품에 안고 물러섰다. 도윤의 총구가 다시 계단 쪽으로 겨눠졌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또 하나, 또 하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표정 하나 없이, 훈련된 걸음으로.
도혁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기는 없었다. 안가에 들어올 때 다 빼앗겼던 걸 뒤늦게 떠올렸다.
'하필 이럴 때.'
맨 앞의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입꼬리만 보였다.
"오랜만이네, 도혁아."
목소리가 지하실 벽을 타고 울렸다.
도혁의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아까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그 음성과 똑같았다.
"...아버지?"
말이 떨려 나왔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사내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조명 아래로 얼굴이 드러났다.
강태산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얼굴, 그러나 목소리는 완벽하게 일치했다.
"뭐야 너."
도혁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며 주먹이 저절로 말렸다.
"목소리를 훔친 게 민재 하나뿐일 거라고 생각했어?"
사내가 웃었다. 웃음소리마저 어딘가 낯익었다.
유진이 서류 속 사진을 다시 내려다봤다. 사진 속 얼굴과 눈앞의 사내, 조명 아래서 겹쳐 보이는 윤곽이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도혁 씨, 이 사람..."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진의 목소리가 잘렸다.
사내의 시선이 서류함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 도혁의 손에 들린 봉투를 향해서였다.
"그거, 아직 못 찾았어야 하는 건데."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했지."
도혁이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유진이 옷깃을 붙잡았지만 뿌리쳤다.
"너 뭐야. 대체 뭔데 그 목소리로."
"윤재."
사내가 짧게 대답했다.
지하실 조명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일제히 총을 겨눴다. 총구 여러 개가 도혁과 유진, 도윤을 정확히 조준했다.
도혁의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이름이 왜 저 새끼 입에서.'
민재가 마지막으로 뱉은 이름, 그 이름의 주인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윤재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자, 이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지하실의 불빛이 완전히 꺼졌다.
암흑 속에서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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