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자리
주인공: 강도혁
연기가 눈을 찔렀다.
유진은 기침을 삼키며 잔해 사이로 손을 뻗었다.
로켓 목걸이가 손끝에 걸렸다. 은색 표면이 열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철민 아저씨.'
그 이름을 떠올리자 손끝이 저려왔다.
목걸이를 움켜쥔 채 유진은 무너진 서재를 둘러봤다. 도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쫓아갈까.'
발이 문 쪽으로 향하다 멈췄다.
지금 도혁을 쫓는다고 뭘 알 수 있을까. 그는 이미 예상보다 몇 걸음 앞서 있었다.
'남는 게 맞아.'
유진은 무릎을 꿇고 재를 헤치기 시작했다.
철민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유진아, 그건... 절대 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안 돼."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기도 전에 불길이 삼켜버렸다.
목이 메었지만 유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울 시간 없어.'
타버린 책장 아래, 반쯤 그을린 서랍이 보였다.
손잡이가 뜨거웠지만 상관없었다. 억지로 당겨 열자 안에서 종이 뭉치가 쏟아졌다.
절반은 재가 되어 부스러졌고 절반은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철민의 필체였다.
날짜와 시간, 전화번호들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통화기록을 손으로 옮겨 적은 것 같았다.
'왜 이런 걸 따로 적어뒀지.'
의심이 들었지만 우선은 읽어야 했다.
한 줄씩 훑어가던 유진의 눈이 어느 이름에서 멈췄다.
서인규.
낯선 이름이었다. 강씨 일가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
'누구야, 이 사람.'
옆에는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회장님 지시로 처리. 절대 발설 금지.*
손이 떨렸다.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화면을 보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메시지를 열었다.
*[너 지금 뭐 뒤지고 있는지 알아. 얌전히 손 떼. 안 그러면 다친다.]*
유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황태식 쪽인가.'
두려움보다 짜증이 먼저 올라왔다. 이 타이밍에 이런 식으로 겁을 주다니 유치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문자에 물러날 것 같아?'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지도 밝히지 않고 협박하는 거, 그게 예의야?]*
전송을 누른 순간 웃음이 새어나왔다. 도혁이 자주 쓰는 말투를 흉내낸 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곧 답장이 왔다.
*[말 잘하네. 근데 넌 지금 위치가 위험하다는 걸 몰라.]*
유진은 서랍 속 종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위험하다는 말이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위험한 거 알아. 그러니까 더 뒤질 거야. 궁금하면 직접 와서 말리든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아니라 흥분 때문이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더 이상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유진은 다시 종이 뭉치를 뒤졌다.
서인규라는 이름 아래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 있었다. 국번이 낯설었다. 아마도 오래된 번호일 것이다.
수첩도 발견됐다. 표지가 반쯽 타버렸지만 안쪽 페이지는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낙서가 가득했다.
*소용없어.*
*소용없어.*
*소용없어.*
같은 문장이 스무 번쯍 반복되어 있었다. 마지막 줄에는 글씨가 삐뚤어져 있었다.
*소용없다니까.*
유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야 이거, 철민 아저씨답네.'
긴장하면 이상한 짓을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숫자를 못 외우면 벽에 낙서를 하던 사람이었다. 회장 앞에서 실수했을 때도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벽에 뭔가를 적곤 했다.
웃음이 잦아들자 손끝이 다시 서늘해졌다.
수첩 뒷장,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색이 바랬지만 형태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젊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기.
유진의 시선이 로켓 목걸이로 옮겨갔다.
목걸이를 열자 안쪽에 작은 사진이 있었다.
같은 얼굴이었다.
'이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참아왔던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설마.'
수첩 페이지를 다시 넘겼다. 서인규라는 이름 옆에 작은 글씨로 뭔가 더 적혀 있었다.
*그 아이는 알아선 안 된다.*
유진은 숨을 삼켰다.
'그 아이가... 나야?'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거림이 아니라 뭔가 어긋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손에 쥔 목걸이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같은 번호는 아니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틈도 없이 손가락이 먼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만 들렸다. 낮고 고르게, 마치 상대가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누구세요."
유진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침묵 끝에 웃음소리가 터졌다.
낮고 걸걸한, 어딘가 익숙한 웃음.
"유진아."
그 한마디에 온몸이 굳었다.
목소리가 철민의 말투와 정확히 겹쳐 있었다.
말버릇도, 억양도, 심지어 숨을 고르는 방식까지도.
"...철민 아저씨?"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액정이 까맣게 변했다.
유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쥔 목걸이만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유진은 목걸이를 움켜쥔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철민 아저씨는 죽었어.'
화재 다음 날 확인된 사망자 명단에 분명 그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 목소리는 뭐였을까.
숨을 고르는 방식, 억양이 흔들리는 지점, 심지어 이름을 부르기 직전 짧게 끊어 삼키는 버릇까지.
'똑같아.'
착각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했다.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봤다. 통화 기록에는 발신 번호가 남아 있었지만 국번이 낯설었다.
수첩 속에서 봤던 번호와 비교해봤다.
'다르네.'
다른 번호였다. 그렇다면 이 전화를 건 사람은 철민이 아니라 그를 흉내낸 누군가.
'누가, 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목소리를 흉내내는 데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경고이거나 협박이거나 아니면 시험.
유진은 종이 뭉치를 챙겨 품에 넣었다. 수첩과 사진도 함께였다.
사이렌 소리가 골목 어귀에서 꺾어드는 게 들렸다.
'나가야 해.'
일어서려던 참에 발밑에서 뭔가 밟혔다. 딱딱한 감촉이었다.
내려다보니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열쇠였다.
녹슬고 그을렸지만 형태는 온전했다. 손잡이 부분에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7-14.
'보관함 번호인가.'
철민이 다니던 은행이거나 어딘가의 사물함일 수도 있었다.
일단 챙겼다. 지금은 뭐든 단서가 될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 무너진 복도를 지나던 유진의 발이 멈췄다.
벽 한쪽에 걸려 있던 사진 액자가 반쯤 타다 만 채 남아 있었다.
강씨 일가 가족사진이었다. 회장을 중심으로 도혁과 형제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철민.
사진 속 철민의 표정이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은 정면을 보는데 그만 살짝 옆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향한 곳에 누군가 있었던 것처럼.
'뭘 보고 있는 거야.'
사진을 떼어내려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그림자 하나가 문가에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낯선 목소리였다. 도혁의 말투와는 달랐지만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경찰인가.'
아니었다. 경찰이라면 저렇게 조용히 다가올 리 없었다.
유진은 품 안의 종이를 더 깊이 숨겼다.
"당신은 누구세요."
그림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발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강철민 씨 물건을 챙기고 계신 것 같아서."
이름을 정확히 짚어내는 말투에 손끝이 굳었다.
'이 사람도 알고 있어.'
"당신이 아까 그 문자 보낸 사람이에요?"
물음에 답 대신 웃음이 돌아왔다. 낮고 짧은 웃음이었다.
전화 속 목소리와는 달랐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다만 이 건물에 오래 볼일이 있었던 사람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해서요."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공손한 척하지만 그 아래 뭔가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건... 도혁 씨 말투랑 비슷한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유진은 스스로도 놀랐다. 지금 이 순간에 그 사람 생각이 왜 나는 건지.
'집중해.'
"비켜주세요. 나가야 하니까."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안에 든 게 뭔지 궁금한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유진의 손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사이렌 소리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붉은 불빛이 창밖에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그 빛을 등지고 완전히 얼굴을 가린 채 섰다.
"내놓으시죠. 그게 서로한테 편할 겁니다."
목소리 끝이 낮아지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들렸다.
유진은 뒷걸음질치다 무너진 벽에 등이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품 안의 종이 뭉치를 움켜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여기서 뺏기면 끝이야.'
숨을 고르는 사이 그림자의 손이 서서히 들어올려졌다.
"강철민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말과 동시에 창밖 불빛이 방 안 가득 붉게 번져들었다.
궁금하지 않냐는 물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궁금하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말해보세요. 궁금하니까."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힘을 줬다. 다리는 이미 후들거리고 있었지만.
그림자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 끝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그렇게 간단히는 안 되죠."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붉은 불빛이 그의 어깨 위로 쏟아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그늘 속이었다.
'왜 얼굴을 안 보여줘.'
숨기는 게 아니라 즐기는 것 같았다. 이쪽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그렇다면.'
유진의 눈이 발밑을 스쳤다. 무너진 벽돌 조각 하나가 손에 닿을 거리에 있었다.
"내놓으라니까요."
손이 더 뻗어왔다. 종이 뭉치를 향해서였다.
그 순간 유진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벽돌을 쥐고 그대로 그림자의 손등을 내리쳤다.
"윽!"
낮은 신음과 함께 그림자가 물러났다. 짧은 틈이었다.
유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무너진 벽 사이 좁은 틈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뒤에서 손이 어깨를 스쳤다.
간발의 차였다.
복도를 내달렸다. 발밑에서 그을린 잔해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멈출 수 없었다.
"거기 서!"
뒤에서 외침이 들렸다. 처음의 그 정중한 말투는 온데간데없었다.
'저것 봐.'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정중한 척하던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그 순간.
'어디서 봤더라, 이 패턴.'
낯설지 않았다. 너무 낯설지 않아서 소름이 돋았다.
건물 밖으로 튀어나오자 소방차 불빛이 눈을 찔렀다. 대원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유진은 인파 사이로 몸을 숨겼다. 뒤돌아보니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놓쳤나. 아니면.'
일부러 놓아준 걸까.
숨을 몰아쉬며 품 안의 종이를 확인했다. 그대로 있었다. 목걸이도, 열쇠도.
'괜찮아. 다 있어.'
안도감이 잠깐 스쳤다가 곧 다른 감각이 그 자리를 채웠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 번호를 확인한 순간 유진의 숨이 멎었다.
아까 그 낯선 번호가 아니었다.
도혁의 번호였다.
'왜 지금.'
받을지 말지 망설일 틈도 없이 손가락이 화면을 눌렀다.
"여보세요."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낮고 고르게, 익숙한 리듬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몇 초, 몇 초가 지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 너머의 웃음이었는데, 아까 그 목소리와 정확히 같은 억양이었다.
철민의 웃음이었다.
도혁의 번호로 걸려온 철민의 웃음.
"유진아."
같은 한 마디였다. 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끊어 삼키는.
목걸이를 쥔 손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멎을 것처럼 느려졌다.
"거기까지 잘 왔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끝에 짧은 웃음이 붙었다.
전화가 끊겼다.
액정에는 분명 도혁의 이름이 떠 있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와중에도 한 가지 생각만이 선명했다.
도혁의 번호로, 철민의 목소리가 걸려왔다.
'대체 누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유진은 어둠 속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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