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자리
주인공: 강도혁
망치가 금고를 내려친다.
쇳소리가 서재 안에 울려 퍼지고 도혁은 그 소리에 맞춰 이를 악문다.
"살살 하십시오. 그러다 손목 나갑니다."
"닥치고 망이나 봐. 니가 이걸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유진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었고 팔뚝에는 힘줄이 도드라져 있다.
도혁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 틈으로 바깥을 살핀다.
'아직이야. 아직 아무도 안 왔어.'
서재 안의 공기가 유독 무겁게 느껴진다.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항상 그랬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도, 죽고 난 뒤에도.
"몇 분 남았어."
유진이 손목시계를 흘끔 보며 중얼거린다.
도혁은 대답 대신 서재를 가로질러 걷는다. 책장 앞에서 발을 멈추고, 다시 문 쪽으로.
같은 동선을 세 번째 반복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안다.
"좀 앉아 계십시오. 왔다 갔다 하니까 정신 사납습니다."
"내가 지금 앉아 있게 생겼냐?"
말이 튀어나가고 나서야 도혁은 자기 목소리가 낯설다는 걸 깨닫는다.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밖에서는.
유진이 잠깐 손을 멈추고 도혁을 올려다본다. 눈빛에 뭔가 걸리는 게 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거나 마저 하십시오."
다시 망치 소리가 시작된다.
도혁은 유진의 손을 본다. 정확히는 손끝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왜 떨지.'
유진은 원래 이런 일에 손이 떨리는 사람이 아니다. 도혁이 아는 유진은, 총구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유진 씨."
"왜."
"손."
유진의 동작이 멈춘다.
"...신경 쓰지 마."
말투가 평소보다 빠르다. 도혁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뭔가 있어. 뭘 숨기고 있어.'
캐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참는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금고 손잡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거의 다 됐다는 신호다. 도혁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거의 다 됐어."
유진이 마지막으로 힘을 준다.
그 순간, 유진의 목에서 뭔가 툭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로켓 목걸이다.
낡은 은색 로켓이 나무 바닥 위에서 몇 바퀴 돌다가 도혁의 발치에 멈춘다.
도혁이 허리를 굽혀 줍는다.
"이거 떨어졌습니다."
로켓을 살피던 손가락이 걸쇠를 발견한다.
'열어볼까.'
별생각 없이 손끝에 힘을 주려는 순간.
"내놔."
유진의 손이 낚아채듯 뻗어온다.
도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뺀다.
"뭔데 이렇게 예민하십니까."
"내놓으라고."
"그냥 목걸이 아닙니까. 왜 이렇게—"
"내놓으라고!"
유진의 손톱이 도혁의 손등을 긁는다. 짧은 몸싸움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로켓의 걸쇠가 풀린다.
작은 사진 한 장이 팔랑거리며 바닥에 떨어진다.
둘 다 동시에 그것을 바라본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사진 속에는 어린아이와 젊은 여자가 있다. 아이는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웃고 있고, 여자는 그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서 있다.
도혁의 눈이 사진에 박힌다.
'이거...'
낯이 익다. 아니, 낯이 익은 정도가 아니다.
저 아이의 얼굴은, 어릴 적 사진첩에서 본 자신의 얼굴이다.
"이게 뭐야."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유진은 대답이 없다.
"이거 나잖아. 나 어릴 때. 근데 이 여자는—"
말을 하다 말고 도혁이 유진의 얼굴을 본다.
젊었을 때의 얼굴이라 해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유진 씨야?"
유진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입술이 몇 번 달싹이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처음이다. 도혁이 알기로 유진이 이렇게 말을 잃은 적은.
항상 냉정하고, 항상 계산적이고, 위기 앞에서도 흔들림 없던 여자가.
지금은 그냥 얼어붙어 있다.
"말해봐."
"..."
"유진 씨. 이게 뭔지 말하라고."
목소리에 날이 서기 시작한다.
'설마. 설마 이 여자가...'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이 뒤엉킨다. 유모였을까. 아니면 다른 뭔가.
도혁의 아버지와 관련된 여자들 중에, 자신이 모르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던 걸까.
"도혁아."
이름을 부르는 순간, 유진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처음 듣는 떨림이다.
"이건—"
그때, 등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금고 문이 완전히 열린 것이다.
동시에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손님이 계셨네."
낮고 정제된 목소리.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흐트러지지 않는 말투.
강철민이 서재 문가에 기대어 서 있다.
얼굴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고, 한쪽 팔은 힘없이 늘어져 있는데도
그 눈빛만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도혁의 손에서 사진이 스르륵 흘러내린다.
"...당신이 왜 여기."
"내가 못 올 곳이라도 되나. 여긴 원래 내 집이었는데."
철민이 절뚝거리며 한 걸음 다가온다.
"그나저나 재밌는 걸 보고 있었네. 도련님이랑 그쪽 아가씨랑."
유진이 로켓을 황급히 주워 쥔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다.
"용건이 뭡니까."
도혁이 애써 평정을 되찾으며 묻는다.
"용건? 없어. 그냥 궁금했지."
철민이 벽에 기댄 채 웃는다. 그 웃음이 소름 끼치도록 여유롭다.
"저 여자가 도련님한테 뭘 말 안 했나 해서."
"닥쳐."
유진이 낮게 내뱉는다.
"닥치라니. 예의 없이."
철민이 도혁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도련님은 참 예의를 중시하시는데, 정작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시나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이 짧아진다. 도혁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물어봐. 저 여자한테. 10년 전 그날 밤에 어디 있었는지."
"닥치라니까!"
유진이 소리치며 철민에게 달려든다.
그 순간 철민의 손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든다.
라이터다.
"어이쿠."
철민이 불붙은 라이터를 근처 서류더미 위로 던진다.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는다.
"뭐 하는 짓이야!"
도혁이 소리친다.
"이 방, 진작 태워버렸어야 했어."
철민이 웃으며 뒷걸음질 친다.
"이 안에 있는 진실이랑 같이."
연기가 서재 안을 빠르게 채운다.
도혁의 눈앞이 흐려진다. 매캐한 냄새와 열기 속에서, 철민의 얼굴이 일렁인다.
그 순간, 도혁은 그 얼굴 위로 다른 얼굴이 겹쳐지는 걸 본다.
불길 속에서 웃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손발이 저릿해진다.
'아니야, 나는 아니야.'
"도혁아!"
유진이 소리친다. 불길이 서가로 옮겨붙으며 책들이 타들어간다.
"강철민 잡아! 지금 아니면 도망가!"
도혁의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철민의 멱살을 잡아채고, 벽으로 밀어붙인다.
"당신 뭘 알아. 뭘 알고 있냐고."
"콜록—"
철민이 기침을 하면서도 웃음을 거두지 않는다.
"도련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으면."
"말해!"
철민의 목이 도혁의 손아귀에서 컥컥거린다.
연기가 짙어지면서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말하라고 했잖아!"
"콜록—궁금하면... 저 여자한테 물어봐."
철민의 눈이 유진 쪽으로 움직인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사장님이 죽던 날... 저 여자가 어디 있었는지."
"그만해."
유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로켓을 쥔 손등에 핏줄이 선다.
도혁의 팔에서 힘이 순간 풀린다.
'무슨 소리야.'
머릿속이 뒤엉킨다. 사진, 로켓, 유진의 떨리던 손끝.
전부 하나로 이어지려는 순간, 철민이 다시 입을 연다.
"그날 밤. 서재에... 세 사람이 있었어."
"세 사람?"
"사장님. 그리고 저 여자."
철민의 시선이 도혁을 향한다.
"그리고 어린 도련님."
바닥이 꺼지는 기분이다. 도혁의 손이 저도 모르게 느슨해진다.
'내가... 거기 있었다고?'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뒤져도 그날 밤은 통째로 비어 있다.
마치 누군가 도려낸 것처럼.
"거짓말."
"거짓말이면 좋겠지."
철민이 피 묻은 입술로 웃는다.
"근데 저 여자 표정 좀 보지 그래."
도혁이 고개를 돌린다.
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불빛 아래 선명하다.
"유진 씨."
"도혁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불이—"
"대답해."
목소리가 갈라진다. 존댓말이 무너진 자리에 날것의 반말만 남는다.
"그날 밤에 어디 있었어."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지금 말하라고!"
고함이 서재를 울린다. 동시에 천장 쪽 서가 하나가 완전히 불길에 휩싸이며 무너져 내린다.
파편이 튀고 유진이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도혁아 위험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철민이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한다.
도혁의 손이 더 세게 멱살을 그러쥔다.
"어디 가."
"콜록... 이거 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뭐."
도혁의 눈에 핏발이 선다. 손등에 힘줄이 튀어나온다.
'놓으면 안 돼. 이 새끼 놓치면 아무것도 못 알아내.'
이성이 점점 흐려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진다.
몸 안 깊은 곳에서 뭔가 낯선 게 치밀어 오른다.
한 번도 이렇게까지 손에 힘을 준 적이 없었다.
"말해. 다 말하라고."
철민의 얼굴이 벽에 짓눌린다. 그 순간 불빛이 일렁이며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진다.
도혁의 눈앞에서 철민의 이목구비가 흐려지더니, 다른 얼굴로 겹쳐 보인다.
굵은 눈썹, 냉소적으로 올라간 입꼬리.
'아버지.'
숨이 턱 막힌다. 손에 들어간 힘이 더 세진다.
"오빠, 그만해!"
유진의 목소리가 서재 전체를 찢을 듯 갈라진다.
처음 듣는 호칭이다. 오빠라니.
도혁의 손이 멈칫한다. 그러나 놓지는 못한다.
'놓으면... 아버지랑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철민의 목에서 캑캑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불길이 서재 절반을 삼켰다.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갑고 시야가 온통 뿌옇다.
그 와중에도 도혁의 손은 풀리지 않는다.
유진이 뛰어와 도혁의 팔을 붙잡는다.
"제발. 이러다 진짜 죽어."
"이 자식이 다 알고 있어. 유진 씨가 숨긴 거, 아버지가 죽던 날—"
"그건 나중에!"
"나중은 없어!"
도혁이 소리친다. 목소리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날카로운 살기가 실려 있다.
철민의 눈이 서서히 풀린다. 그런데도 입가엔 옅은 웃음이 걸려 있다.
"봐라... 도련님. 아버지랑... 똑같잖아."
그 한마디에 도혁의 온몸이 얼어붙는다.
손에 들어간 힘이 그대로, 놓아지지도 더 조여지지도 않은 채 멈춘다.
불길이 치솟는 소리, 유진의 비명 같은 외침, 무너지는 서가 소리가 한꺼번에 귓속으로 밀려든다.
도혁의 눈에 비친 건 이제 철민도 아버지도 아닌,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다.
손아귀에 힘이 그대로 멈춰 있다.
철민의 얼굴이 점점 검붉게 변해간다.
"오빠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목소리가 낮게 떨린다. 존댓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미 무너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유진이 도혁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는다. 손톱이 살에 파고든다.
"지금 그거 설명할 시간 없어. 제발, 이 손 좀 놔."
"말해. 왜 나를 오빠라고—"
"강도혁!"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다르다. 처음부터 예의를 갖추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투가 왜.'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 같다. 존댓말 뒤에 숨어 있던 뭔가가 지금 다 흘러나오고 있다.
천장 서가 하나가 완전히 무너진다. 불길이 두 사람과 철민 사이 바닥을 가른다.
순식간에 서재가 반으로 나뉜다. 문 쪽엔 유진, 안쪽엔 도혁과 철민.
"도혁아, 이쪽으로 뛰어!"
유진이 불길 너머로 손을 뻗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뛰어야 하는데.'
발이 안 떨어진다. 손에 쥔 철민의 멱살, 그것만이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진실 같다.
"놔주면... 다 잊혀져."
철민이 캑캑거리며 웃는다. 웃는 게 아니라 웃는 척하는 얼굴이다.
"당신 아버지도... 그렇게 손에서 안 놨어. 그날 밤."
"닥쳐."
"근데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아?"
도혁의 손끝이 저릿하다. 열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구분이 안 간다.
'놓으면 이 새끼가 다 가지고 도망간다. 진실이든 뭐든.'
'근데 이러다 정말 아버지처럼—'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서까래 하나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기울어진다.
"위험해!"
유진의 비명이 연기 속을 찢는다.
도혁이 반사적으로 철민을 밀치며 몸을 튼다. 서까래가 방금 전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떨어진다.
먼지와 불티가 사방으로 튄다.
철민이 그 틈에 벽을 짚고 옆문 쪽으로 절뚝이며 빠져나간다.
"잡아야—"
몸을 일으키려는데 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다.
'놓쳤다.'
가슴 안쪽이 뜨겁게 죄어든다. 불길 때문만은 아니다.
"도혁아!"
유진이 무너진 잔해를 넘어 다가온다. 손을 뻗어 도혁의 팔을 잡아 일으킨다.
"괜찮아? 정신 차려봐."
가까이서 보니 눈가가 젖어 있다. 그을음과 눈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다.
'이 여자, 나를 오빠라고 불렀어.'
"유진 씨."
"지금은 나가는 게 먼저야. 얘기는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대체 언제까지 나중이야."
도혁이 유진의 손을 뿌리친다. 손등에 아직 철민의 목을 조르던 감각이 남아 있다.
"방금 그 손. 봤어? 내가 어떤 얼굴로 그러고 있었는지."
"도혁아—"
"아버지랑 똑같았어."
목소리가 갈라진다. 연기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모른다.
"그 인간이 사람 조를 때 짓던 표정, 나도 방금 지었어. 내 손으로."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살아야 하니까—"
"닥쳐."
말이 뱉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는다.
유진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불길이 두 사람 사이로 넘실댄다. 열기가 얼굴을 태울 듯 가깝다.
'이 여자도 아버지랑 관련 있어. 그날 밤에 거기 있었어. 근데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그리고 방금 나는, 내가 제일 되기 싫어했던 그 인간이 됐어.'
"비켜."
"강도혁, 이러다 진짜—"
"비키라고!"
도혁이 유진을 지나쳐 무너진 잔해 사이로 걸어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어디 가는 거야! 밖은 이쪽이야, 도혁아!"
목소리가 등 뒤에서 부서진다.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자격이 없다고,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처럼.
연기 속으로, 아직 꺼지지 않은 불길 속으로.
도혁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
유진이 잔해를 붙잡고 주저앉는다. 로켓을 쥔 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진다.
"...오빠."
아무도 듣지 못한 그 한마디가, 무너지는 서재 안에서 재처럼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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