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균열, 그리고 제4의 선택
주인공: 강민준 / 아벨리우스
손끝이 투명한 버튼에 닿는 순간, 세계가 비명을 질렀다.
[ERROR: 다중 선택 감지]
[시스템 규칙 위반]
[강제 종료 개시]
메시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빨강, 파랑, 초록, 회색. 네 개의 버튼이 미친 듯 깜빡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섯 번째 버튼을 누른 손에서 빛이 퍼져 나갔다. 차갑고 날카로운 빛. 마치 유리가 깨지는 소리 같았다.
한서진의 검이 목 앞 1cm에서 멈춰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게 아니었다. 1초가 무한히 반복되고 있었다. 검날에 비친 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아, 진짜 죽는 건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터지고 있었다. 1초마다 계속.
그런데 한서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지된 세계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눈에서만 눈물이 흘렀다. 볼을 타고 턱 끝까지.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입술이 움직였다.
'바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눈빛은 분노가 아니었다. 안도였다.
"서, 서진아..."
말을 걸려던 순간, 관찰자의 비명이 터졌다.
"넌 게임을 망쳤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 완벽하던 존재의 목소리가. 관찰자의 몸이 에러 코드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글리치 현상이 팔에서 시작해 어깨로, 목으로 번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공포.
"이건... 이건 안 돼! 규칙을 어겼어! 넌 선택할 수 없어!"
관찰자가 민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픽셀 조각으로 흩어졌다. 마치 제로가 사라졌던 것처럼.
"그, 그러니까..."
민준이 말을 더듬었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관찰자의 눈을 똑바로 봤다.
"...짐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떨림은 여전했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관찰자의 등 뒤에서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상위 관리자 개입 감지]
[하위 시스템 권한 박탈 예정]
"뭐?"
민준의 눈이 커졌다. 관찰자 뒤쪽 허공에 거대한 코드 창이 펼쳐졌다. 숫자와 문자가 폭포처럼 흘렀다.
관찰자가 뒤를 돌아봤다.
"아니, 아니야. 난 규칙대로 했어. 난 그냥..."
목소리가 떨렸다. 저 완벽하던 존재가 변명을 하고 있었다.
"넌... 넌 그냥 게임 말이었던 거야?"
민준이 물었다. 관찰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닥쳐! 넌 몰라! 넌 아무것도 몰라!"
비명이었다. 관찰자의 몸이 더 빠르게 무너졌다. 얼굴 절반이 에러 코드로 뒤덮였다.
바닥이 갈라졌다.
아니, 바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맞나. 검은 공간에 흰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들이 하나씩 깨져 나갔다. 균열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숫자들.
끝없이 흐르는 0과 1.
'여긴... 어디지.'
머리가 아팠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다섯 번째 버튼. 투명한 버튼. 거기 뭐가 써 있었더라.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버튼이 아직 떠 있었다. 손을 뗐는데도. 투명한 표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강민준]
자기 이름이었다.
"이게... 뭐야."
말이 새어 나왔다. 네 개의 버튼은 여전히 깜빡였다. 빨강은 '파괴', 파랑은 '복원', 초록은 '도주', 회색은 '항복'. 모두 정해진 선택지였다.
그런데 다섯 번째는.
이름.
'거부가 아니었어.'
깨달음이 번개처럼 왔다. 거부는 시스템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었다. 정해진 선택지를 버리고, 자기 이름으로 새로운 규칙을 쓰는 것.
"하... 이거 진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미친 상황인데 웃음이 나오다니.
그때 발테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오... 폐하..."
희미했다. 코드 조각으로 흩어진 상태인데도 의식은 남아 있었다. 픽셀 파편들이 민준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발테온?"
"이것이... 진정한... 선택..."
목소리가 끊겼다 이어졌다. 라디오 잡음 같았다. 하지만 분명 말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게임을... 바꾸셨습니다..."
코드 조각들이 빛났다. 민준의 손 위로 모였다. 따뜻했다. 차가운 시스템 안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것.
한서진의 검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1cm 거리가 2cm로 벌어졌다. 시간이 풀리기 시작한 걸까.
"서진아."
민준이 손을 뻗었다. 떨렸다. 손이 떨렸다. 목소리도 떨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서진의 손목을 잡았다.
검을 쥔 손. 차가운 손. 그 손이 민준의 손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이번엔 내가 선택할게."
목소리가 나왔다. 떨림 없는 목소리. 처음이었다. 진짜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손목이 따뜻했다.
검을 쥔 손목이. 자신을 죽이려던 그 손이. 민준의 손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한서진의 입술이 움직였다.
"놔."
처음 들리는 목소리였다. 시간이 풀리기 시작했다. 1초의 무한 반복이 깨지고 있었다.
"싫어."
민준이 대답했다. 손에 힘을 줬다. 떨렸지만 놓지 않았다.
한서진의 눈이 흔들렸다.
"왜."
"그, 그러니까..."
버릇이 나왔다. 긴장하면 나오는 그 말버릇. 하지만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관찰자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필요하니까."
목소리가 작았다. 떨렸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한서진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땅!
금속음이 울렸다. 시간이 완전히 풀렸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민준이 얼른 받아냈다.
"야, 야! 괜찮아?"
"...무거워."
한서진이 중얼거렸다. 민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뭐가?"
"선택이."
목소리가 떨렸다. 민준의 어깨가 축축해졌다. 눈물이었다.
'아, 진짜 운다.'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등을 두드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나.
"너 때문에..."
한서진이 말을 이었다. 어깨를 떨며.
"...몇 번을 죽였는데."
"응?"
"루프마다. 너를. 내 손으로."
목소리가 갈라졌다. 민준의 셔츠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넌 매번 날 믿었어. 바보처럼."
"...그게."
민준이 입을 열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
나온 건 사과였다.
한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눈물 자국이 볼에 남아 있었다.
"뭐가."
"네가... 힘들었을 것 같아서."
민준이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웠다. 이런 말 해본 적이 없었다.
한서진이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울면서 웃는 얼굴. 눈물이 흐르는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짜 바보네."
"...어."
민준도 웃었다. 억지로가 아니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그때 관찰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
목소리가 갈라졌다. 몸의 절반이 에러 코드로 뒤덮인 상태였다. 얼굴이 픽셀로 흩어졌다 복구됐다를 반복했다.
"넌... 넌 게임을 망쳤어!"
손가락이 민준을 가리켰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사라지고 있었다.
"게임?"
민준이 물었다. 한서진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자신이 앞에 섰다.
"이게 게임이라고?"
목소리가 낮아졌다. 떨림이 사라졌다. 차가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관찰자가 뒤로 물러났다.
"넌... 넌 몰라. 규칙이 있어. 시스템이 있어. 넌 그냥..."
"게임 말?"
민준이 끊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너도 그렇잖아."
관찰자의 눈이 커졌다.
"뭐?"
"상위 관리자. 그거 봤어. 너도 누군가한테 조종당하고 있었어."
민준이 허공을 가리켰다. 아까 떴던 메시지 창이 있던 곳.
[상위 관리자 개입 감지]
그 문구가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관찰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닥쳐! 난... 난 다르다고!"
비명이었다.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민준이 웃었다.
"뭐가 달라. 너도 무서웠잖아. 권한 박탈당한다고 했을 때."
"...그건."
"너도 선택 못 했잖아. 정해진 대로만 움직였잖아."
말이 나왔다. 자신도 놀랄 만큼 차갑게.
'이게... 내 목소리 맞나.'
신기했다. 떨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관찰자가 무릎을 꿇었다.
아니, 무너졌다. 다리가 코드 조각으로 흩어지며 지탱할 수 없게 됐다.
"난... 난 그냥..."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린아이 같았다.
"...게임 끝내고 싶었어."
"뭐?"
민준의 눈이 커졌다. 한서진도 놀란 표정이었다.
관찰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 절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몇 번째인지 알아? 이 루프가?"
"...몰라."
"783,492번째야."
숫자가 터져 나왔다. 민준의 머리가 멍해졌다.
"78만... 번?"
"너만 반복한 게 아니야. 나도... 나도 계속 여기 있었어."
관찰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매번 같은 대사. 같은 선택지. 같은 결말."
"그럼..."
민준이 입을 열었다. 목이 말랐다.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야."
"죽여야 끝나니까."
관찰자가 웃었다. 울음 섞인 웃음.
"규칙이야. 주인공이 죽으면 게임이 종료돼. 그럼 난... 난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미친..."
한서진이 중얼거렸다. 검을 주우려다 멈췄다.
민준이 관찰자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나한테 선택지를 준 거야? 어차피 죽을 거니까?"
"...응."
"네 번째 선택지. 회색 버튼. 항복."
"그거 누르면 넌 스스로 사라져. 시스템이 너를 지워."
관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이 관찰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를 맞췄다. 코드 조각으로 흩어지는 얼굴을 똑바로 봤다.
"그럼 넌 뭐야."
"...뭐?"
"게임 말이면서 게임 진행자. 그게 뭐야."
관찰자의 남은 눈이 흔들렸다.
"난... 난 그냥..."
말이 끊겼다. 입술이 떨렸다.
민준이 손을 뻗었다.
천천히. 관찰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허공을 만지는 것 같았다.
"너도 선택 못 했구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떨림이 없었다.
관찰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남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코드 조각들이 눈물처럼 떨어졌다.
"나도... 나도 끝내고 싶었어..."
"알아."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게... 적인가.'
적대감이 사라졌다. 분노도. 남은 건 허무함뿐이었다.
한서진이 다가왔다.
검은 바닥에 놔둔 채. 빈손으로. 민준 옆에 섰다.
"몇 번째 루프에서 깨달았어?"
그녀가 물었다. 관찰자를 내려다보며.
"...처음부터."
관찰자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게임 시스템이라는 걸. 끝낼 수 없다는 걸."
"그래서 규칙을 만들었어?"
"...응."
고개가 끄덕여졌다. 목이 픽셀로 깨지며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죽음. 파괴. 복원. 도주. 항복. 다섯 개 중 하나만 선택하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안 끝났지."
민준이 말했다. 관찰자가 웃었다.
"...응. 몇 번을 돌려도."
허공에서 빛이 터졌다.
[시스템 붕괴 진행률: 47%]
빨간 글씨였다. 경고음이 울렸다. 귀를 찢을 것 같았다.
"뭐야, 이거."
한서진이 뒤로 물러났다. 민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같이 있어."
"...어."
그녀가 대답했다. 손에 힘을 줬다.
바닥이 무너졌다.
아니, 바닥이 사라졌다. 검은 공간이 흰색으로 뒤집혔다. 0과 1이 흐르던 코드 창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관찰자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아직...!"
몸이 빠르게 흩어졌다. 다리가 사라졌다. 허리가 사라졌다. 가슴까지.
민준이 손을 뻗었다.
"잡아!"
관찰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차가움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왜... 왜 날..."
관찰자가 물었다. 남은 눈이 민준을 봤다.
"몰라."
민준이 대답했다. 솔직했다.
"근데 넌 혼자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아."
"...미친놈."
관찰자가 웃었다. 울음 섞인 웃음.
그 순간.
허공에서 새로운 창이 떴다.
[상위 관리자 긴급 개입]
[게임 강제 종료 승인]
[모든 데이터 초기화 예정]
민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초기화?"
"...끝이야."
관찰자가 중얼거렸다. 힘이 빠진 목소리.
"모든 게 사라져. 너도. 나도. 이 세계도."
"그럼 다시 시작하는 거야?"
한서진이 물었다. 손이 떨렸다.
"아니."
관찰자가 고개를 저었다. 목이 끊어질 듯 삐걱거렸다.
"진짜 끝. 아무것도 안 남아."
"...미친."
민준이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다섯 번째 버튼.'
생각이 거기로 향했다. 투명한 버튼. 자기 이름이 새겨진 것.
[강민준]
'거부가 아니었어. 새로운 규칙을 쓰는 거였어.'
손을 놓았다. 관찰자의 손을.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뭐 해?"
한서진이 물었다. 민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에서 빛이 퍼졌다.
투명한 버튼이 나타났다. 아까보다 선명했다. 자기 이름이 빛났다.
"이거..."
민준이 중얼거렸다. 버튼을 만졌다. 따뜻했다.
'누르면 뭐가 바뀌는 거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답은 없었다.
관찰자가 웃었다.
"그거 눌러봤자 소용없어."
"왜?"
"넌 규칙을 몰라. 시스템을 몰라. 그냥 누르면 너만 사라져."
목소리가 약해졌다. 가슴까지 사라진 상태였다.
민준이 버튼을 내려다봤다.
[강민준]
이름 아래 작은 글씨가 보였다. 처음 보는 문구.
[새로운 규칙을 입력하세요]
"...입력?"
민준의 눈이 커졌다. 규칙을 쓸 수 있다는 건가.
"그, 그러니까..."
버릇이 나왔다. 긴장했다. 손이 떨렸다.
한서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천천히."
목소리가 차분했다. 떨림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민준이 숨을 들이켰다.
'뭘 써야 하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파괴? 복원?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것?
발테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희미했다. 코드 조각 상태인데도 의식이 남아 있었다.
"선택은... 폐하의 것..."
"발테온."
민준이 중얼거렸다. 코드 조각들이 손 위로 모였다. 따뜻했다.
'혼자가 아니야.'
깨달았다. 자기만의 선택이 아니었다. 한서진도. 발테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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