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계승자
주인공: 강도혁
새벽 네 시.
빗소리만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강도혁은 관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삼십 분째 같은 자세다.
고개는 숙인 채,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
검은 양복에 빗물이 스며들어도 꿈쩍 않았다.
'아버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뇌출혈.
의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도혁은 알고 있었다.
강철민은 죽을 때까지 술과 담배를 끊지 않았다. 새벽마다 부하들을 두들겨 팼고, 혈압약 따윈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당신이 원하던 대로 죽으셨네요.'
비웃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관 뒤편에 조직 간부 일곱 명이 서 있었다.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았다.
조문객들은 진작 떠났다. 남은 건 의무감으로 버티는 사람들뿐.
도혁은 그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유약한 놈.'
'조직 물려받아봤자 석 달 못 간다.'
'합법 사업부나 맡던 애송이가 뭘 안다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도혁은 대학 졸업 후 줄곧 건설 쪽만 맡았다. 서류 검토하고, 계약서에 도장 찍고, 세금 아끼는 법이나 배웠다.
조직 일선엔 발도 안 들였다.
아버지가 그렇게 키웠으니까.
"이제 일어나게."
박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팔이라 불리는 남자. 쉰여덟 살. 강철민과 삼십 년을 함께한 고참이었다.
"회장님도 자네가 이러길 원치 않으셨어."
민재의 손이 도혁의 어깨에 닿으려던 순간.
끼익—
밖에서 타이어 소리가 터졌다.
급제동.
세 번 연속.
간부들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저거."
누군가 중얼거렸다.
도혁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왔구나.'
예상했던 일이었다.
강철민이 죽은 지 사흘.
라이벌 조직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쾅!
장례식장 문이 벌컥 열렸다.
빗물 섞인 바람이 휘몰아쳤다.
"야, 조문 왔다!"
황태식의 목소리.
백호파 2인자. 마흔둘. 얼굴 왼쪽에 칼자국이 세로로 그어져 있었다.
뒤따라 부하 열두 명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재킷 안쪽엔 총이 보였다.
"예의가 없군."
민재가 앞으로 나섰다.
"여긴 장례식장이오. 돌아가시오."
황태식이 껄껄 웃었다.
"예의? 이 바닥에 예의가 어딨어, 박 사장."
민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뒤에 선 간부 둘이 슬쩍 재킷 단추를 풀었다. 총자루가 드러났다.
백호파 조직원들도 일제히 손을 재킷 안으로 넣었다.
일촉즉발.
장례식장 안이 얼어붙었다.
황태식은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관 앞까지.
도혁이 무릎 꿇은 바로 그 앞까지.
"새 보스님께 인사드리러 왔는데."
황태식이 허리를 굽혔다.
"얼굴 좀 보자, 도련님."
조롱이 묻은 목소리였다.
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었다.
"야."
황태식이 손을 뻗었다.
검지로 도혁의 턱을 치켜들었다.
"사람이 말하는데 대답은 해야지."
도혁의 얼굴이 천천히 올라왔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이 보였다.
검고, 깊고, 텅 빈 눈.
황태식의 웃음이 멈췄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게 예의지."
도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뭐?"
황태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새끼야?"
손이 올라갔다.
도혁의 뺨을 때리려던 순간.
철컥.
도혁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황태식의 손목을 낚아챘다.
"억—"
황태식이 신음을 삼켰다.
손목이 조여들었다. 뼈가 삐걱거렸다.
"손님, 장례식장에서 소란 피우시면 곤란하십니다."
도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다.
하지만 손아귀 힘은 달랐다.
뚝.
뼈 부러지는 소리.
"으아아악!"
황태식이 비명을 질렀다.
무릎이 꺾였다.
"이, 이 새끼가—"
욕설이 채 끝나기 전에 도혁이 몸을 일으켰다.
황태식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쾅!
관 옆 탁자에 얼굴을 처박았다.
향로가 넘어지며 재가 흩날렸다.
"내가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반말.
도혁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낮고, 차갑고, 날이 선 목소리.
"이 개새끼야."
황태식의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으, 으윽…"
"죽여! 저 새끼 죽여!"
백호파 조직원 하나가 소리쳤다.
열두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도혁은 황태식을 놓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은 채 몸을 돌렸다.
첫 번째 놈이 주먹을 휘둘렀다.
도혁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팔꿈치가 올라갔다.
퍽.
코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팔에 전해졌다.
"크윽!"
첫 번째 놈이 뒤로 나자빠졌다.
# 피의 계승자 (전개부)
두 번째 놈이 옆구리를 향해 무릎을 올렸다.
도혁이 황태식을 밀어냈다. 몸을 낮췄다.
무릎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일어서며 손날을 올렸다.
퍽.
목덜미에 꽂혔다.
"커억—"
두 번째 놈이 쓰러졌다.
세 번째, 네 번째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도혁의 시야가 좁아졌다.
소리가 멀어졌다.
'아버지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
열두 살 때 처음 본 아버지의 주먹.
피투성이가 된 부하의 얼굴.
'나는 다르다고 믿었는데.'
주먹이 날아왔다.
도혁이 팔로 막았다. 충격이 뼈를 타고 올라왔다.
동시에 반대편에서 발차기.
옆구리에 박혔다.
"으윽."
신음이 새어 나왔다.
뒤로 두 걸음 밀렸다.
"물러서지 마! 한꺼번에 붙어!"
황태식이 코피를 흘리며 소리쳤다.
나머지 조직원들이 일제히 쏟아져 들어왔다.
도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음이 아니었다.
경련에 가까웠다.
'그래, 이게 나야.'
첫 번째 주먹을 피했다.
두 번째 주먹을 받아쳤다.
세 번째 놈의 팔을 잡았다.
비틀었다.
뚝.
관절이 어긋나는 소리.
"으아아악!"
비명이 터졌지만 도혁은 듣지 않았다.
놓지 않고 당겼다.
그 몸을 방패 삼아 뒤에서 오는 주먹을 막았다.
"이 새끼, 놔!"
누군가 도혁의 목을 뒤에서 조였다.
숨이 막혔다.
시야가 흐려졌다.
'죽이면 안 돼.'
정신 한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죽이면 끝이야.'
하지만 손은 저절로 움직였다.
뒤통수를 향해 머리를 젖혔다.
쾅.
뒤에 있던 놈의 코가 부러졌다.
"끄윽!"
목을 조이던 팔에 힘이 빠졌다.
도혁이 몸을 숙여 그를 어깨너머로 집어던졌다.
쿵.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다섯 명이 쓰러졌다.
나머지 일곱 명이 멈칫했다.
도혁은 숨을 고르며 그들을 바라봤다.
양복 소매가 찢어져 있었다. 입술 끝에서 피가 흘렀다.
"계속할 거야?"
목소리는 낮았다.
떨림 하나 없었다.
황태식이 이를 갈았다.
"총 꺼내!"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일곱 명이 일제히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검은 총구들이 도혁을 향했다.
박민재가 앞으로 나섰다.
"야, 이 미친놈들아!"
민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총을 꺼내!"
하지만 황태식은 비웃었다.
"강철민 죽었잖아. 이젠 네 세상 아니야, 박 사장."
민재 뒤에 선 간부들도 총을 빼들었다.
장례식장 안이 일촉즉발이었다.
도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하십시오."
존댓말.
다시 돌아온 공손한 말투.
"총 내리세요. 여긴 아버지 빈소입니다."
황태식이 코웃음 쳤다.
"야, 이 개새끼야. 지금 협박하냐?"
"협박이 아닙니다."
도혁이 고개를 돌렸다.
관을 바라봤다.
"그냥 예의를 지키자는 겁니다."
황태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이상했다.
목소리는 공손한데 눈빛이 달랐다.
텅 비어 있었다.
감정이 없었다.
"박 사장님."
도혁이 민재를 불렀다.
"총 내리십시오."
"하지만 도련님—"
"내리라고요."
한 옥타브 낮아진 목소리.
민재가 움찔했다.
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십 년 전.
도혁이 열여덟이던 그날 밤.
'설마.'
민재는 천천히 총을 내렸다.
뒤에 선 간부들도 따라 내렸다.
황태식이 껄껄 웃었다.
"역시 호구네. 아버지 그늘에서만 살더니—"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도혁이 움직였다.
세 걸음.
황태식의 눈앞까지.
총구가 도혁의 이마에 닿았다.
"움직이지 마, 새끼야."
황태식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도혁은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쏴봐."
"뭐?"
"쏘라고, 개새끼야."
도혁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총을 옆으로 쳐냈다.
탕!
총성이 터졌다.
천장에 구멍이 뚫렸다.
도혁의 주먹이 황태식의 명치에 박혔다.
퍽.
"커억—"
황태식이 몸을 구부렸다.
도혁이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무릎을 올렸다.
쾅.
얼굴이 무릎에 처박혔다.
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식이 바닥에 쓰러졌다.
나머지 조직원들이 총을 겨눴다.
도혁은 황태식의 총을 주워 들었다.
장전 손잡이를 당겼다.
찰칵.
탄피가 튀어나왔다.
"다음은?"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손은 떨리지 않았다.
백호파 조직원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보스가 쓰러졌다.
상대는 혼자지만 미친놈이었다.
"물러나라."
민재가 앞으로 나섰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너희 두목 데리고 꺼져라."
조직원 둘이 황태식을 부축해 일으켰다.
# 피의 계승자 (위기-클리프행어)
"물러서!"
민재의 목소리가 장례식장을 가득 채웠다.
백호파 조직원들이 황태식을 끌고 뒷걸음질 쳤다.
도혁은 총을 내리지 않았다.
검은 총구가 그들의 등을 따라갔다.
문이 닫혔다.
빗소리만 남았다.
"도련님."
민재가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도혁은 대답 대신 총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또 시작이야.'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입술을 깨물었다. 철 냄새가 번졌다.
"물 좀."
누군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도혁이 단숨에 비웠다.
"49재까지 경호 인원 두 배로 늘리십시오."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혁이 관을 돌아봤다.
"아버지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돌아가시던 날."
민재의 눈빛이 흔들렸다.
"주치의와 간호사,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은요?"
"...최유진 비서가 서류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갔습니다."
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류요?"
"네. 회장님께서 서명하실 문서였는데."
"무슨 서류?"
민재가 잠시 망설였다.
"비자금 명단이었습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도혁은 민재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명단, 어디 있습니까?"
"회장님께서 서명하신 후 금고에 보관하라 하셨는데."
민재가 말끝을 흐렸다.
"금고를 열어보니 없었습니다."
쾅.
도혁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향로가 덜컹거렸다.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습니까?"
"송구합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혼란스러워서요?"
도혁이 한 발짝 다가섰다.
"그 명단에 뭐가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민재가 입을 다물었다.
"정치인 이름, 검사 이름, 경찰 간부 이름.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게 새어 나가면 우리 다 죽습니다."
도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도련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렸습니다."
민재가 고개를 숙였다.
"이 일은 제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도혁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진작 올걸.'
후회가 밀려왔지만 소용없었다.
"최유진은 어디 있습니까?"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들어오라 하십시오."
민재가 문을 열었다.
최유진이 들어왔다. 서른둘. 검은 정장에 뿔테 안경.
"부르셨습니까?"
"명단 이야기 들었습니다."
도혁이 팔짱을 꼈다.
"그날 금고 비밀번호 아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유진이 잠시 생각했다.
"회장님, 박 사장님, 그리고 저."
"셋뿐입니까?"
"네."
도혁의 시선이 민재에게로 향했다.
민재가 손사래를 쳤다.
"저는 아닙니다. 맹세코."
"맹세요?"
도혁이 비웃었다.
"이 바닥에서 맹세가 무슨 소용입니까?"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도련님, 저를 의심하십니까?"
"의심 안 하면 바보지."
반말이 튀어나왔다.
도혁이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다시 존댓말.
하지만 민재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민재가 돌아섰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문이 닫혔다.
유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 사장님은 아닐 겁니다."
"근거는요?"
"회장님께서 돌아가시던 날, 박 사장님이 금고를 열어본 건 제가 지켜봤습니다."
유진이 안경을 고쳐 썼다.
"명단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진심으로 놀라셨어요."
도혁이 창밖을 바라봤다.
빗줄기가 유리를 때렸다.
"그럼 당신입니까?"
"저라면 지금 여기 없겠죠."
유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명단 팔아넘기고 도망갔을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도혁이 관 쪽으로 걸어갔다.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낮게 중얼거렸다.
"이게 원하신 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빗소리만 들렸다.
"CCTV 확인해보셨습니까?"
도혁이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금고 쪽 영상은 이틀 전에 삭제됐습니다."
"누가요?"
"보안팀장 김성훈."
도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사흘 전부터 연락 두절입니다."
쾅.
도혁의 주먹이 바닥을 내리쳤다.
"제기랄."
욕이 터져 나왔다.
유진이 한 걸음 물러섰다.
도혁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존댓말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 회의 준비해주십시오. 간부 전원 소집."
"알겠습니다."
유진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도혁은 혼자 남았다.
관 앞에 섰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차갑고, 굳어 있고, 평화로웠다.
'평화롭다고?'
도혁이 쓴웃음 지었다.
'당신이 평화로울 리가 없지.'
손을 뻗어 관 뚜껑을 쓰다듬었다.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이 꼴이네요."
혼잣말이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죠. 어차피 원하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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